ADVERTISEMENT

〃「식민상처를 뽐낸 한국」이라니…〃|이호철<작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일본의 대표적인 월간지『문예춘추』 3월 호와 같은 회사 자매지『제군』 3월 호가 대담기사와 권두언으로 또 다시 한국인의 상처를 건드려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 지극히「천박한」내용을 접하면서 필자는 얼마 전에 일본의 모 평론가가 어느 신문엔가 썼던 다음과 같은 글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구석인가 안으로 오므라들려고 하는 기척이 현재의 일본사회에는 있다. 이 나라가 평화롭고 당장의 삶이 풍요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가 하는, 섬나라에 정주하여 쌀 농사 위주로만 살아온 긴 역사를 지닌 민족의「본색」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여서 그 평론가는「쌀 농사」를 오늘의「자동차 농사」등으로 대체해놓고 있었다.
그렇다. 그 대담과 권두언 속에는 최소한의「 경우 바름」조차 일거에 활딱 벗어버린 일본인의 생생한「본심」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인다.
사실 지나간 한일관계 속에서 우리 한국인들은 단 한번도 36년간의 식민통치의 아픔에 대해 일본측의 진정하고도 허심탄회한「사과」나「사죄」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옛날 상처들이 새로 돋아 오를 때마다 그때그때 나름대로 발뺌이나 일삼고, 자잘하게「경우」를 따지고, 시원하게 탁 트인 소리를 한번도 못 들었다. 사과하는「형식」이나 말 몇 마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진심」「본심」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심·본심은 삼척동자나 일개 필부라도 이심전심으로 적절하게 알아지게 마련이다. 한일관계의 지나간 역사는 간단히 일괄 처리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고 그 상처가 너무 다양하다. 정신대 문제만 해도 그렇다. 피해자 한사람 한사람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파파 늙은이로 모질게도 시퍼렇게 살아서 이제야 비로소 자기들의 버려진 청춘을 알알하게 털어놓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일관계의「개괄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 피해자 한사람 한사람의 뼈저린 실체인 것이다. 그 실체를 눈앞에 보면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아픔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이상의 냉 혈족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식민지 지배로 얻은 상처를 뽐내며」라니 어찌 감히 이런 소리까지 할수 있다는 말인가. 이 말은 바로 일본인들 특색의 하나인「경우 바름」의 정체가 무엇이 었느냐 하는 것까지 일거에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또한 그 글들 속에서 거론되고 있는 무역 불균형 문제나 기술이전 문제만 해도 그렇다.「원료와 부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수출하는 한국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만 번 옳고,「일본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첨단기술을 일본정부가 마음대로 줄 수 없다」는 지적도 구구절절 옳지만 그렇게 북 치고 장구 쳐대는 그 대담자나 권두언 필자의「마음씀」이 어느 목으로 치우쳐 있느냐 하는 점이야말로 관건인 것이다.
물론 필자는 그들이 작금의 일본 여론을 대표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양심적인 일본지식인들의 뼈를 깎는 반성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생산적인 논의들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종류의 극히 신경질적인 언설이 나올 정도로 오늘 일본이 처해있는 국제적인 외상정립이 매우 어렵게 되어있다는 것까지도 이해한다.
사실「태평양 글로벌리즘」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21세기를 향한 새로운「협력이념」까지 부상하고 있는 작금에 기왕의 양국관계의 묵은 상처 하나 하나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일본 쪽의 치부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로서도 일말의 지겨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양국관계를 정립하려고 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탁 트인 허심탄회한 마음의 자세다. 보더리스(국경상실)까지 이 자리에서 쳐들 것은 없고, 서로가 사람으로서 응당 지녀야 할 양식에 입각해 그 상처들을 진정으로 같이 감당해내면서「마무리지을」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세기말로 내다보는 유럽통일은『멀리는 그리스·로마문명·기독교, 가까이는 프랑스혁명과 근대과학 등 유럽이 창출해낸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공감, 거기다가 지난 세계대전에의 반성, 각국에 고르게 익어있는 민주주의의 기반과 가치관이 배경에 깔려 있음으로써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 일본론자는 보고 있었는데 세계를 향해서는 이만한 시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정작 바로 이웃인 우리나라에 대해서만은 그토록 야박하고 소갈머리가 좁은 것은 웬일인가.
차라리 일말의 측은함조차 느끼지 않을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