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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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림=김태헌

나는 엄마의 기색을 살폈다. 엄마의 얼굴은 늘 집에 돌아올 때 그렇듯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 어리고 있었는데, 엄마는 내게 참고서를 건네기 위해 내 방 의자에 앉더니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이상해 위녕, 오늘 정말 이상한 일이 있었어."

내가 언제나처럼 세상에 나갔다가 돌아온 엄마의 조잘거림을 들어주기 위해 마주 앉자 엄마는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오늘 너무나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엄마가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더니 세상이 하나도 남김없이 지워져버리는 거야."

엄마는 딸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잠깐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은 엄마 평생 처음이야. 소설 속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을 때도 소설이니까 뻥이겠지, 그렇겠지 했어. 세상에! 소설가들이 쓴 말이 진짜였구나 싶더라구."

나는 드디어 내 계획이 예상대로 되어가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엄마의 말을 기다렸다. 물론, 엄마의 반응이 좀 예상외로 열정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물었는데 내가 대답도 못하고 도망쳤어. 어떻게 내가 그럴 수가 있을까?"

"서점에서?"

내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엄마는 "서점?"하고 묻더니 이어서 "아니…. 서점에 아르바이트 여자애가 있던데" 했다. 맘 같아서야 "아니, 서점 아저씨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엄마는 서점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요 아래 편의점에서의 일이야…. 내가 늘 사던 대로 잭 다니엘 술을 사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걸 집어들고 있는 거야. 그 편의점엔 잭 다니엘 사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주인이 엄마 위해서 늘 한 병만 가져다 놓는데 그 사람이 그걸 사려고 하는 거야. 그 사람이 좀 머뭇거리길래 내가 '그거 사실 거예요?'하고 묻는데 그 사람이 날 바라보았어. 그 순간이야. 엄마의 가슴이 쿵, 하고 무너져내린 게."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 질문에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데?"

내가 물었다.

"몰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약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엄마가 이런 반응을 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어서 나는 다시 물었다.

"나이는 얼마쯤 되어 보이는데?" "몰라."

"어떻게 생겼는데?" "몰라."

"직업은 뭐 같아 보였어?" "몰라."

"그래서 어떻게 했어" "몰라, 하나도 생각이 안 나."

"엄마, 정신 차려봐 남자는 남자였어? …혹시 여자 아냐? 아니면 귀신?"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가 묻자 엄마는 가볍게 눈을 흘기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중요한 건 엄마가 이런 느낌을 처음 받았다는 거야. 엄마 소설에 연애 이야기 중에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야기가 하나도 없거든. 엄마는 그런 거 없는 줄 알았다니까. 와우! 신난다. 그 사람이 누구면 어때? 그 사람이 어떻게 생긴 건 또 무슨 의미가 있겠냐구? 중요한 건 엄마가 그런 경험을 했다는 거야. 다음 소설에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 사람 이야기를 써야겠다. 이제 경험했으니까 알겠거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엄마에게 아직 이런 느낌이 남아 있을 수가 있다는 거야."

엄마는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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