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혁시시각각

노 대통령과 한·미 FTA 협상단 잘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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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뭘 찾는 거야?" 박스들을 뒤적거리는 정씨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아, 예. 지금 쇠고기 관세 철폐 기간을 13년까지 늘려 놨거든요. 미국 애들도 완전히 지쳐 있어서 이참에 확 밀어붙이는 중인데 배가 너무 고파서… 혹시 먹을 것 좀 없나요?"

하지만 정씨는 결국 빈 속으로 돌아갔다. 미리 사뒀던 수백 개의 컵라면은 진작에 동난 뒤였다. 그래도 한국 농업팀은 그날 새벽 할 만큼 했다. 쇠고기 관세 철폐 기간을 2년 더 밀어붙여 15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사례가 너무 신파조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며칠간 편집국에서 동료 기자들과 함께 새벽까지 한.미 FTA 협상을 지켜본 소감은 이렇다. "한국 협상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건 부담스럽다. 나중에라도 협상팀이 뭔가 잘못한 대목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0일부터 2일까지 약 80시간 동안 진행된 이번 협상은 한편의 드라마가 분명했다.

협상에는 이골난 세계 최강 미국 대표단과 맞서 "이런 건 절대 못 받는다"며 여러 차례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김종훈 협상 대표, 잘했다. 협상 대표들은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그러다가도 17개 분과별 협상팀 중 어딘가에서 협상이 결렬되면 다시 한국 협상팀을 데리고 오면서 "나도 이렇게 애쓰니까 양보 좀 하라"고 미국 측을 구슬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게 바로 협상술이다.

200명쯤 됐던 우리 협상팀도 정말 고생했다. 미국 협상팀은 회담이 지지부진하면 호텔방에 올라가 잠도 자고, 샤워도 했다. 하지만 우리 협상팀은 김현종.김종훈 두 대표에게만 방이 주어졌다. 그래서 새벽 서너 시까지 진행되던 협상이 한두 시간씩 지연되면 국장은 소파에 쓰러져 눈을 붙이고, 과장과 일반 직원들은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졸았다. 당신들이 그렇게 노력한 것, 아는 사람은 안다.

그렇게 해서 한.미 간에 FTA가 체결됐다. 비판하는 분들도 다 애국하는 충정에서 그런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정말 보통이 아니다. 악착같고 눈치 빠르기로 치면 세상에 따를 민족이 별로 없다. 1960년대 필리핀에서 원조받아 건물 짓던 나라가 지금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 되지 않았는가. 미국과 상대하면서 한시바삐 경쟁력을 키우고, 그걸 바탕으로 중국.일본.동남아.유럽 등을 상대해 나가자. 100여 년 전엔 외세가 강제로 우리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이번엔 우리가 먼저 문을 열어 그들을 친구와 손님으로 끌어들였다. 안 그러면 선조들과 똑같은 꼴을 당할 것이기에.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많은 걸 잃었다. 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소리를 들었다. 그를 노골적으로 밀었던 일부 방송.신문.인터넷 매체도 공격 대열에 가담했다. 정치인이 이런 걸 감내하긴 정말 힘들다. 그야말로 '노무현이 아니면'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게 정치적 리더십이다. 68년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하고 포항제철 만들 때 박정희 대통령은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70년 마산수출자유지역을 세울 때도 그랬다. 벌거숭이 민둥산이 지금처럼 울울창창해진 것도 박 대통령의 결단 덕분이었다. 그를 미워해도 이런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순 없다. 나는 노 대통령이 지금 '최종 결정을 내리는 자의 고독'을 많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미 FTA를 단행한 노 대통령의 결단은 역사 속에서 평가받을 것으로 믿는다. 그것이 지지자들의 돌팔매 속에서 이뤄졌기에 더욱 빛난다. 그동안 노 대통령이 미웠다고 그의 공로를 모른 체하고 깎아내리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노 대통령과 한.미 FTA 협상단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