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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반점 보고 박대통령인줄 알아|4발 맞은 경호관 10시간만에 소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시신의 윗 옷을 올려 복부를 확인한 김 병원장은「무아경」을 잠시 체험할 정도로 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대통령 복부의 진균성피부염(반풍·Tinea Versicolar)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이었다.
『우리 의사들은 직업상 환자의 얼굴보다는 병 소가 더 눈에 익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 왜 산부인과의사가 어쩌고 하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그때 노인성 소양증으로 배에 흰 반점이 있었어요. 물론 각하께는「노인성」이라는 말은 빼고 보고를 드렸지만 요.』

<"예스 노만 말해요"
시신을 대통령전용병실로 옮긴 김 병원장은 병원관리·경비를 담당하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전두환 사령관에게 상황을 알리려고 애를 쓰지만 이미 궁정 동에서 손에 피를 묻히고 온 유성옥이 집요하게 감시하는 통에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평소 친하게 지내던 우국일 보안사참모장이 전화를 해 왔다.
『김 박, 지금 곤란한 상황일 테니까 묻는 말에 예스, 노만 말해요. 죽었습니까?』『예.』, 『차 실장이요?』『아니오.』, 『코드 원?』『예.』
병원장실의 소파와 전화기 위치, 누군지 모를 감시자가 서 있을 위치까지를 정확히 감 잡고 있던 우 준장이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유성옥·서영준 두 사람은 이날 밤 보안사의 이상연 대령(현 내무부장관)팀에 체포됐다. 오전 3시쯤에는 청와대 당직 근무 자이던 경호실 5과2계장 전경환씨(전 보안사령관의 동생)가 부하들을 데리고 와 대통령의 유해를 청와대로 옮겼다.
날이 밝은 한참 뒤 궁정동안가로 현장 점검하러 갔던 보안사요원들이 다급히 전화를 했다. 『한사람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군의관 좀 보내 주세요.』
궁정 동 곳곳의 시체를 한구 한구 확인하던 중 박상범 경호 관이 신음소리를 내자 기겁을 해 김 병원장을 찾은 것이었다. 중정 요원들로부터 무려 네발의 총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던 박 경호관(현 민주평통 사무차장)은 10시간 가량 방치돼 있었는데도 기적같이 살아났다. 박씨의 기억.
『각하께서 궁정 동 신관(나동)내실에 드신 뒤 나와 동료경호원 김용섭·김용태, 중정 경비원 김용남 등 네 명이 주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두 발의 총성이 들리 길래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창문 쪽에서 우리를 향해 사격이 시작됐지요. 허리 께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뒤로 나가 떨어졌고, 그 다음은 기억이 없습니다. 깨어 보니 병원이었어요.』
박 경호 관에게 날아간 네발 중 두발은 공교롭게도 양복 겨드랑이 께를 뚫고 지나갔다. 한발은 허리에 맞았으나 권총실탄(당시 경호원들은 혁대 좌우 측에 6발씩 모두 12발의 예비실탄을 차고 다녔다)에 부딪쳤다. 부딪친 실탄은 탄두가 으스러져 있었다. 나머지 한발이 오른쪽 허리아래를 지나 엉덩이로 관통됐으나 신기하게도 뼈나 신경조직은 다치지 않고 근육 층만 꿰뚫었다.

<아웅산 때도 수행>
고려대 법학과출신의 박씨는 해병대장교시절 박종규 경호실장이 눈여겨본 탓에 거의 차출되다시피 경호원이 되었다. 뛰어난 무술솜씨, 두뇌회전에다 월남전에서 풍부한 실전경험까지 쌓은 탓이었다. 베트남에서는 특수부대 소대장으로 여러 차례 사선을 넘었다. 식사도중 적이 발사한 1백22mm 로킷 포탄이 바로 옆에 떨어졌으나 불발이 되는 바람에 살아난 적도 있었다. 74년 육 여사 피격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다. 10·26사건이후『각하께서 돌아가신 현장에 있었으니 나는 죄인』이라며 사표를 냈으나 반려됐다. 83년10월9일 터진 버마(현 미얀마)아웅산 폭파사건 때는 경호 실 수행과장으로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전용차에 동승하고 있다가 역시 기적같이 사신을 피했다. 단순히 행운아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기구한 운명이었다. 역사적인 사건들마다 반드시 그를 목격자로 끌어 들였다고 나 할까.
10·26을 계기로 박대통령의 경호 실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호 실 차장이 육군중장이던 것을 대폭 깎아 내려 아예 정동호 준장(현 민자당 의원)이 경호실장에 임명됐다. 수경사 병력에 대한 지휘권한도 박탈됐다.
궁정 동에서 숨진 차지철 경호실장 등 5명이 안치된 서울대병원에서도 문상 온 동료경호원들은 분위기에 짓눌려 제대로 곡소리도 내지 못했다. 다른 기관에서 총을 들이대고 몽땅 잡아가지나 않을까,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김병훈 실장보좌관(후에 청와대의전수석)이 수경사에 요청해 헌병 병력들로 하여금 영안실주변을 집총 자세로 경비하게 하자 비로소 유족과 친지들이 통곡도 하고 술도 들이키더라고 한 전직 경호원은 전했다. 실제로 경호 실 요원들은 그해 말부터 다음해에 걸쳐 모두 74명이 무더기로 해직되고 이중 79년에 쫓겨난 49명은 나중에 제정된 해직공무원보상법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

<탄환 박힌 채 안장>
그중 한 명인 신현순씨가 털어놓는「10·26이후」의 소감.『매년 10월26일에 각하 묘소를 찾았습니다. 처음 2년간은 신같이 모셨던 고인에의 감회와 직장도 없이 떠도는 내 처지에 대한 비감이 어우러져 국립묘지 길을 내려올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3년째 부 턴 기독교에 귀의했는데, 믿음이 깊어지면서 비로소「각하도 약점이 있는 한 인간이었구나」하는 게 실감되더군요. 진짜 하느님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경호 실에 근무할 때는 이후락씨가 말한「박정희 교 신자」라는 말이 별로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어요.』
김재규 부장이 확인사살 차 박대통령의 뒷머리에 쏜 총탄 한발이 얼굴의 왼쪽광대뼈에 박혀 있어 김 병원장은『수술로 제거해 고인을 깨끗이 모시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장녀 근혜씨가『아버님 시신에 다시 칼질을 할 수 없다』고 극구 반대, 결국 탄환은 대통령의 몸에 박힌 채 국립묘지에 함께 묻히게 됐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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