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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FTA] 'FTA 드라마' 협상 타진에서 타결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기 2004년 11월 미 USTR 대표, FTA 제의하다

"한국이 미국과 FTA를 한번 협의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 회의 기간 중 한.미 통상장관 회담이 별도로 열렸다.

로버트 졸릭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FTA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꺼냈다. 김 본부장의 귀가 솔깃했다. 당시 멕시코가 세계 통상 분야에서 일을 저질렀다. 멕시코는 일본과 FTA를 맺은 직후 다른 국가에 대한 관세를 갑자기 두 배로 올려버렸다. 한국산 타이어를 싣고 멕시코로 향하던 우리나라 수출 컨테이너선이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왔다.

국내에서도 FTA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미국과도 FTA가 추진됐다. 하지만 잇따른 우리의 제의에도 미국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2004년 한국이 캐나다와 전격적으로 FTA를 추진하면서 미국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한.캐나다 FTA가 성사될 경우 한국산 제품이 캐나다를 통해 무관세로 미국시장에 쏟아질 가능성에 조바심을 냈다. 그때부터 미 USTR 내부에서 "우리도 한국과 FTA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급기야 FTA 추진을 제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승 2005년 11월 노 대통령 - 부시, 의지 확인하다

"FTA로 시작해 FTA로 끝났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FTA에 대한 양국의 의지를 처음 확인했다.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우려가 나올 무렵이었다. 두 정상은 2시간 가까이 오찬을 하면서도 한.미 FTA 이야기만 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보다 두 달 앞선 9월 8일 노 대통령의 남미 순방길. 노 대통령은 전세기 안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독대해 보고를 받았다.

"선진형 통상국가로 가려면 미국과 FTA가 필요합니다. 민감 품목을 개방에서 예외로 하거나 장기간 관세 철폐로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김 본부장) "우리 경제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당장 시작합시다." 한참 생각하던 노 대통령의 지시였다.

한.미 간에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이에 앞서 미국 측은 묵은 통상 현안이었던 ▶스크린 쿼터 감축▶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자동차 배출가스 기준 완화 ▶새로운 약가 산정 제도의 도입 유보 등 네 가지를 먼저 해결해줄 것을 한국에 요청했다.

전 2006년 2월 미 의사당서 협상 개시 선언하다

"이제 두 나라는 반세기가 넘는 동맹국으로서 FTA 협정 체결을 통해 양국 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김현종 본부장과 로버트 포트먼 미 USTR 대표는 미 의사당에서 양국 간의 FTA 협상 개시를 공식 선언했다. 해가 바뀌면서 네 가지 현안에 대한 우리 측의 대책이 잇따라 발표되자 협상 논의는 속도가 붙었다. 1월 13일 광우병 파동으로 중단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 협상이 타결됐고, 1월 26일에는 한덕수 당시 부총리가 스크린 쿼터를 절반으로 축소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한.미 FTA 협상 개시 선언의 신호탄인 셈이었다. 그러나 협상 개시 선언 다음날 열린 정부 주최의 한.미 공청회는 "여론 수렴 없이 사전 각본에 의한 협상"이라며 농민들이 회의장에 난입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협상 기간 내내 갈등과 진통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결 2007년 3월 '끝장 협상' 벼랑 끝서 날아오르다

6월 1차(워싱턴)를 시작으로 양국을 오가며 진행된 한.미 FTA 협상은 4차(제주)때까지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핵심 쟁점으로 협상의 초점이 좁혀지면서 양국 간의 힘겨루기는 더욱 거세졌다. 협상 시한(2007년 3월 말)이 다가오면서 미국은 곧잘 '벼랑 끝 전술'로 우리 협상단을 압박했다.

7차 협상 전까지 미국 대표단은 자신들의 자동차.섬유시장 개방 개선안을 내놓지 않았다. 미국은 불쑥 "협상 시한을 꼭 지킬 필요 있느냐. 시한을 넘겨 천천히 협상하자"며 압박을 가해 왔다. 우리 측이 한때 협상 결렬까지 검토했을 정도였다.

보호무역 성향이 강한 미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북한 핵실험까지 터지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러나 2007년으로 접어들면서 협상은 진전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한.미 FTA가 경제.외교.안보를 아우른 한.미 동맹의 '업그레이드'라는 공동인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국 대선을 앞두고 반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기에는 한.미 FTA가 결렬되면 한.미 동맹의 균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미 정가 내부의 진단도 한몫했다.

미국은 입장을 바꾸어 마지막 고위급 '끝장' 협상 장소로 서울을 선택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중동 순방에 나선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미 FTA 핵심 내용을 조율했다. 남은 문제는 협상의 기술적 문제였고, 한.미 FTA 타결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홍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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