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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FTA] 400만원 싸진 '포드 500' 타지만 약값은 두 배 비싸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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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의 타결은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 변화의 물결은 먹고, 쓰고, 즐기고, 일하는 우리의 삶 속에 알게 모르게 다가올 것이다. FTA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2010년 어느 날, 가상인물인 김 부장의 하루를 통해 변화상을 살펴보자.

2010년 5월 3일. 월요일 출근길에 나선 K전자 김 부장은 약간 들뜬 기분이다. 어제 큰맘 먹고 산 포드의 '파이브 헌드레드'를 몰고 거리로 나서는 첫날이기 때문이다. 미국 차는 기름을 많이 먹는다는 아내의 반대도 있었지만 4000만원에 가깝다가 3000만원대 중반으로 떨어진 차 값이 그를 유혹했다. 관세 8%와 관련된 세금까지 내려간 데다 미국 업체의 마케팅이 치열해지면서 차 값은 10% 이상 떨어졌다. 국산차와 미국 수입차의 차 값이 비슷해지자 '나 같은 월급쟁이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수입차 한 번 몰아보나'하는 배짱도 작용했다.

점심 시간을 앞두고 잠깐 근처 은행에 들렀던 김 부장은 부쩍 친절해진 서비스를 느꼈다. 금감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한국에는 없던 미국식 금융상품이 하나 둘씩 들어오면서 펀드 선택 폭도 조금씩 넓어졌다. 창구 직원은 "한국에 쇠고기를 수출하면서 수익성이 높아진 미국 영농 기업을 대상으로 투자하는 미국 펀드가 생겼다"며 투자를 권했다. 좀 더 따져보겠다며 안내책자를 건네 받은 김 부장은 거래처 손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내 H호텔 양식당을 찾았다. 미국 뉴욕식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뼛조각 문제로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던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서 10만원에 가깝던 호텔 스테이크 값은 6만원대로 떨어졌다. 김 부장은 지난 주말 저녁 가족과 들렀던 고깃집에서 예전 같았으면 15만원은 족히 나왔을 계산이 9만원대로 떨어진 사실을 떠올렸다. 'FTA 효과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스테이크와 함께 시킨 와인은 미국 캘리포니아산 나파밸리 와인. 관세가 내리면서 7만원대이던 와인 값도 5만원대로 떨어졌다. 몇 년 전 칠레와의 FTA 체결로 값이 내리는 바람에 많이 찾던 칠레산 '몬테스 알파'의 인기도 최근엔 미국산 와인에 밀리는 듯한 인상이다.

'한.미 FTA, 그거 괜찮네'하던 김 부장의 생각은 퇴근 직전 가벼운 두통 증세로 들렀던 약국에서 헷갈렸다. '새로 나온 좋은 약'이라며 약사가 건네준 두통약을 손에 쥔 김 부장은 약값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예전보다 거의 두 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발한 신약의 특허권 보장 기간이 늘어나는 바람에 이젠 국내 제약사가 복제약(제네릭)을 함부로 만들 수 없어 비싸졌다"는 약사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기분이 찜찜하다. 다만 비아그라 같이 보험이 안 되는 오리지널 약은 조금 싸졌다는 약사의 설명을 귓등으로 들으며 약국 문을 나왔다.

'만사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구나'하는 생각은 귀갓길 상경 농민의 시위를 보고서 더 강해졌다. '농촌 경제 다 죽는다, 한.미 FTA 철회하라' 'FTA 비준한 국회의원 자폭하라'는 과격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농민들에게 막혀 한 시간 이상 포드 차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김 부장은 짜증이 나기보다는 왠지 미안하고 착잡한 심정이 됐다.

오후 9시가 다 돼서야 겨우 집에 도착한 김 부장은 오랜만에 아내와 쇼핑을 했다. 내일 있을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대형 마트 정육점 코너 한 곳에는 여전히 한우 고기가 진열돼 있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미국산보다 2~3배는 비싸기 때문이다. 과일 코너도 마찬가지. 3년 전만 해도 관세가 45~50%에 달했던 오렌지.사과.체리 등 과일은 값이 뚝 떨어졌다. 아내는 "이렇게 품질 좋은 과일이 이 가격에 나오다니…" 하며 즐거워 했지만 김 부장은 귀갓길 농민 시위 광경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그런데 대형 마트 한쪽에 마련된 미국 브랜드의 수입 의류는 그렇게 싸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브랜드는 미국이지만 실제로는 베트남.태국.중국 등 제3국에서 만들기 때문에 한.미 FTA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는 매장 점원의 답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 부장은 고1짜리 딸 녀석이 케이블 TV에서 미국 드라마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싫은 소리를 한마디했다. FTA로 외국 방송물 편성 비중이 커지면서 젊은이들 사이에선 미국 드라마가 유행이다. 하긴, 불륜 같은 비도덕적인 소재에 울고 짜는 한국 드라마 대신 가볍고 빠른 진행의 미국 드라마가 젊은 애들 감각에 맞을 거란 생각도 해본다.

이현상 기자

◆ '오리지널'약과 '제네릭'약=제약사가 다년간의 연구 끝에 자체 개발한 신약을 '오리지널'이라 하고, 이런 오리지널 약의 성분을 약간 바꿔 비슷한 약효를 내는 약을 '제네릭'이라 한다. 기업 규모가 작은 한국 제약사들은 대부분 외국 제약사가 개발한 오리지널 약을 복제한 '제네릭'을 많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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