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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청와대 타결의지 읽고 막판 ‘벼랑 끝 전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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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동석 농림부 통상정책관(왼쪽)과 스티븐 노턴 미 무역대표부(USTR) 대변인(오른쪽)이 31일 오전 서울 하얏트호텔 로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중앙SUNDAY자동차와 쇠고기가 문제였다. 1년여에 걸친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의‘끝장 협상’이 벌어진 31일 새벽 막판 여섯 시간은 자동차와 쇠고기를 저울질하는 양측의 벼랑 끝 대치가 이어졌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이틀 연장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양쪽은 고도의 심리전에 정보 빼내기, 제안에 역제안으로 맞받아치는 첩보영화와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30일 밤과 31일 새벽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벌어진 막전 막후 스토리를 중앙SUNDAY가 단독 추적했다.

■ 30일 협상은 자동차ㆍ쇠고기 싸움=하루 앞으로 다가온 협상시한을 의식한 한국 정부는 30일 최대 난제인 자동차 부문에서 미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정치적 타결만 남은 농업분야와 달리 자동차는 한국으로서는 대(對)국민 설득을 위해서도 반드시 ‘관세 즉시 철폐’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야 하는 분야였다.

이날 오후 한국이 예상외로 강하게 나오자 미국은 돌연 시한 연장을 공식 제안한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인터넷 언론에 보도되자 미국 대표단의 노턴 대변인은 기자실에 내려와 “우리는 결코 협상연장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고 시치미를 뗐다. 미국 제안은 이날 오후 4시 청와대 서별관에서 권오규 부총리 주재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공식 거부된다.

장외 신경전과 별도로 장내 자동차 공방도 열기를 더해갔다. 미국은 양보안을 내놓기는커녕 한국의 자동차 관세를 즉시 철폐하고, 미국의 관세는 3∼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내리는 비대칭 관세철폐안으로 맞받아쳤다. 미국이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진 쇠고기도 미국이 요구하는 시장개방 범위를 놓고 김현종 본부장과 바티야 부대표가 농업분과 협상에 직접 참여해 협상이 철야로 진행됐다.

■‘선 타결 후 조문화’ 카드 꺼낸 미국=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온 것은 오후 8시 무렵. 미국이 자동차섬유 등에서 개선된 안을 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밤 9시 30분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10시쯤 공식 타결 발표가 있을 것 같다”고 귀띔해준다.

이 무렵 미국 측은 이날 낮에 제안했던 협상 연장 차원에서 ‘선(先)타결선언,후(後)조문화 추가 협상’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무역촉진권한(TPA) 시한이 임박해옴에 따라 일단 협상 타결을 공식 발표하고 쇠고기ㆍ자동차ㆍ섬유 등 주요 분야의 상세한 내용은 이틀간 더 논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은 즉각 청와대에 보고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숙고에 들어갔다. 하지만 돌발변수가 생겼다. 윤승용 홍보수석이 이쯤 청와대 기자들에게 미국 제안을 공개하며 검토 입장을 밝힌 것. 미국은 이를 보고 한국 측이 협상 결렬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듯 이때부터 벼랑 끝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간다. 밤 10시30분 무렵 미국 백악관 대변인이 “수 시간 내 진전이 없으면 협상 타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적인 발언을 한 사실이 외신을 타고 들어왔다. 이에 대해 청와대 일각에서 “윤 수석의 성급한 발언 때문에 협상이 꼬였다”는 비판이 빗발쳤고 대통령도 나중에 윤 수석을 불러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 결국 쇠고기 카드 내민 한국=밤 11시 다시 분위기가 변했다. 우리측이 역제안을 내놓는다. 감자 등 민감농산물 관세철폐에서 일부 미국에 양보하고, 쇠고기에 대해서도 ‘5월 국제수역기구(OIE) 총회 결과를 보고 검역절차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협정 발표 시 포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신 최대 현안인 자동차 관세의 즉시 철폐와 막바지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섬유 분야 관세철폐 품목 확대를 요구했다. 우리로서는 주권문제로까지 비화된 쇠고기 검역 문제를 완화해주겠다는 사실상의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이다.

이 내용은 즉시 미국에 보고됐다. 회담은 워싱턴의 반응을 기다리며 자정 무렵 대부분 중단됐다. 미국 측은 우리 측이 타결을 서두른다고 보고 “의회 입장이 확정되지 않았다. 본국 훈령이 늦어진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오전 3시 무렵 본지 기자와 만난 협상단의 노턴 대변인은 “협상 타결이 여명전(before the dawn)까지는 어렵겠다”며 “타결시한이 월요일까지라는 견해도 있다”고 협상 연장을 암시했다. 미국 본국으로부터의 답변은 새벽 4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자동차 문제를 충
분히 고려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과 함께 대신 기간통신사의 외국인 투자 지분 제한(49%)을 완화해줘야 한다는 추가요구를 들고 나왔다. 시한은 다가오고 있지만 협상은 좀처럼 끝을 맺지 못했다.

새벽 5시를 넘기며 협상 타결이 도저히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돌았다. 새벽 6시 무렵 양측 김종훈 대표와 커틀러 대표가 다시 만났다. 협상 타결의 윤곽은 잡혔지만 몇 가지 쟁점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협상 48시간 연장만을 발표하기로 한다.

오전 7시30분. 발표장으로 들어서는 김종훈 수석대표의 얼굴 주름이 피곤 때문인지 더 깊게 보였다. 김 대표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양측의 공통 인식에 따라 협상을 48시간 연장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윤창희 기자 thepl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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