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은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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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나라당 중진 일부가 정계에서 자진 용퇴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기성 정치에 식상한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 스스로 정치권의 인적 쇄신 기회를 제공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이런 움직임이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돼 새로운 정치환경을 만드는 계기가 돼야 한다.

한나라당은 반(反)김대중 정서에 편승해 영남권에서 3,4선 이상 중진들이 할거하는 병폐를 낳았다. 특히 이들 중에는 5 .6공 때부터 의원직을 유지해온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수구'와 '부패', '노인당' 이미지를 벗지 못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두번의 대선에서도 패배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기득권을 앞세운 다선들이 포진한 정당에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중진들이 용퇴를 결심한 것은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정계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처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치권의 물갈이는 국민적 요구이자 시대의 흐름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이가 많으니, 다선이니 물러가라고 한다면 누가 승복하겠는가. 누가 보아도 합리적인 기준을 만들어 원만한 가운데 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직도 상당수 중진의원이 '떠밀려서는 못 하겠다'고 반발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데 있을 것이다. 새 시대를 열어 주고, 후진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는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용퇴결심을 하는 것이 순리다. 그것이 아름다운 퇴장이다. 박관용 국회의장이나 김용환.강삼재 의원 등 이미 불출마를 선언한 사람들도 그 배경에 관계없이 평가받는 까닭이다.

다수 중진이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까지 들고 나오며 반발하고 있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다. 국민도 그런 주장 뒤에 감춰진 속셈을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다. 스스로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자기도 살고, 소속 정당도 살리는 길이다. 최병렬 대표는 이미 대폭 물갈이를 천명했다. 한나라당은 이들이 용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명예롭게 정계를 물러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권 전체에 파급효과를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