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교류 향한 전문가들 제안 (4)|"민간 부문 접촉 과감히 허용을"|학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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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몹시 중요한 일을 할 때 먼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한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 지을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시점에서 학술 교류의 필요성이 간절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알아야하고 이해해야 하며, 서로가 인정할 수 있는 합의를 이루어 내야한다.
많은 학자들이 이를 위해 노력해왔다. 통일원 자료에 따르면 89년 이후 지난해 10월말까지 학술 분야의 교류는 모두 36건이 이루어져 무려 연인원 6백37명이 북한 동포를 만났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여름 방학 기간인 7, 8월 두달간 중국의 한인 자치 지역인 연변은 마치 성지 순례 기간의 메카를 연상시켰다. 남쪽의 학자 수백명이 학술 회의 참석차, 혹은 개인적인 자료 수집 차 연길로 모여들었다. 90년 남북 학자들이 함께 결성했던 고려학회 주최「한국학 소장 학자 국제 학술 회의」와 연변대 주최 「조선학 국제 학술 회의」가 가장 큰 행사였다.
「소장 학자 회의」에 참가했던 학자들은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학술 단체 협의회 소속 참가자들은 내부 평가서에서 남북 학술 교류 측면의 성과로 ▲북한 학계의 동향 (학문 수준·연구 경향 등)에 대한 개괄적 이해 ▲교류 제안을 위한 기초 자료 수집 ▲참가 연구자간의 공감대 형성 (협의회 소속 교수 대표들은 별도의 회의를 통해 북한측 참가자 대표인 김양선 단장 등과 「학술 교류 성사를 위해 각별히 노력할 것」을 합의했다)등을 예거했다. 이는 분명 남북 학술 교류의 진일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교류는 그야말로 제3국을 통한 「접촉」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남북 학자간의 직접 교류는 아직 한 건도 성사되지 못했다. 90년11월 학술 단체 협의회의 교류 제안은 일본을 통해 북한 사회과학원에 전달됐는데 『뜻에는 공감하지만 아직 시기가 아니다』라고 모호하게 거절한 이후 진전이 없다.
지난해 8월 한국 철학회 주최 「한민족 철학자 대회」에는 『참가하겠다』고 통보까지 하고서도 참가하지 않았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정치·군사 우선주의」때문이다. 일단 남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부차적 개별 교류는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국제정 세의 변화와 남북한 국내 사정, 특히 어려운 북한의 경제 사정은 변화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불가피한 남북 접촉의 과정에서 학술 교류는 상대적으로 용이한 편이다. 북한이 꺼리는 대규모 개방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의 선택적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 볼 때 교류의 효과와 필요성에 비해 위험성이 적다는 의미다. 따라서 제3국을 통한 교류나마 지금까지 꾸준히 늘려올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다. 교류의 확대를 이끌기 위해 유연하면서도 과감해야한다. 학술 단체 협의회 공동 대표로 교류를 추진해온 안병욱 교수 (성심여대)는 『민간부문의 활동을 정치적으로 과감하게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북한이 요구하는 분야, 요구하는 상대를 인정해주고 또 지원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통일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학술적 논의가 사회 체제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신을 가진 가운데 북측이 주장하는 체제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정부의 조치로는 「서울 사회 과학 연구소」 사건을 통해 학문의 위축을 초래했던 국가 보안법의 개정 등이 지적된다. 동시에 교류의 당사자인 학자들도 보다 신중하고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홍보 차원에서 남북 교류를 제안한다고 떠들고서는 아무런 후속 조치를 모색하지 않는 불성실한 자세, 북한의 약점을 꼬집어 교류 거부의 명분만 축적하는 냉전적 사고 등 모두가 시급히 벗어버려야 할 통일 시대의 멍에들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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