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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사관앞의 농민절규(촛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부시 미국 대통령 방한 이틀째인 6일 농민단체의 항의방문이 예정된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주변은 하루종일 경찰의 삼엄한 경비망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전 10시40분쯤 농민대표들이 탄 승합차가 미끄러지듯 대사관앞으로 들어오면서 주위는 순식간에 치열한 몸싸움의 현장으로 변했다.
제대로 차에서 내릴 수 조차 없었던 농민단체 회원들은 대표 1명만 대사관측에 서한을 전달한다는 조건아래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이제 한국농민의 대부분은 미국의 50∼60년대 잉여 농산물 원조가 「은혜」가 아닌 고도의 전략적 농산물 침략정책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전국농민단체협의회 강춘성 회장(55)은 격앙된 목소리로 항의 서한을 읽어내려갔다.
『…세계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해나가는 시점에서 유독 미국만이 자국의 경제위기를 약소국가에 떠넘기기 위해 외교적 압력을 무차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입니다….』
강회장은 이어 항의서한과 성명서가 든 흰봉투를 닫혀있는 대사관정문 쇠창살틈새로 어렵게 밀어 넣었고 무표정한 대사관 직원 하나가 아무말없이 이를 받아들고 들어가버렸다.
오후 4시20분쯤에는 경찰의 철벽수비(?)에 막혀 영등포역전 집회마저 갖지 못한 전국농민회총연맹 회원 1백30여명이 서울지하철 종각역 구내에 다시 모여 차가운 콘크리트바닥에 앉아 『농민가』 『늙은 농민의 노래』 등을 부르며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역구내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1시간여동안 선전전을 벌인뒤 오후 5시40분부터 대사관으로 진출하려다 경찰과 30여분간 몸싸움 끝에 32명이 연행됐다.
『37세 먹은 아들이 장가도 못가고 농사를 짓고 있는데 쌀시장마저 개방되면 집안 살림 끝나게 된다기에 답답해서 올라왔는데 제대로 가지도 못하게 막기만 하니 가슴만 더 타는구만.』
전북 익산에서 왔다는 박순임 할머니(66)는 구질구질 내리는 빗방울을 피하려하지도 않고 깊게 팬 볼속으로 담배 한모금을 깊숙이 빨았다.<정형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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