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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 한국영화 임영(영화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안성기는 84년 일본에서 있었던 「현대 한국영화의 밤」에 참석했을 때 그쪽 영화인들로부터 같이 작업해 보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었다. 그 이유는 그의 스타일이 독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본에는 안성기 배우같은 스타일의 연기자가 없다는 것이며 그는 동양적도, 서양적도 아닌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게 그들의 말이었다.
최인호작가가 그를 평해 너무 일찍 예기에 물든 아역배우 출신이 가지고 있는 천기가 전혀 없는 예의바르고 착한 배우라고 어딘가에 쓴것을 본적이 있다.
일본영화계는 67년 하명중배우에게도 출연을 교섭해 그 준비로 하명중이 와세다대학까지 다니던 중 당시로서는 거금인 2백50만엔을 주며 일본으로 귀화하라고 해 분연히 그것을 박차고 귀국했었다.
안성기는 출연료, 즉 개런티 문제에 있어서도 이해(?)가 깊다. 교섭하는 쪽에선 시장가격에 준하는 상당한 고액을 내기는 해야겠는데 한계가 있는 제작비 사정상 그렇게는 못내겠어서 말못하고 우물우물하면 도리어 안성기쪽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액수보다 적은 액수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럴때 교섭하던 쪽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안성기는 여러번 봤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한국영화계의 실정을 늘 보고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일본의 톱스타 다카쿠라겐(고창건)도 자기가 개런티를 올리면 다른 배우들도 출연료를 올려 일본영화계가 어려워진다는 견지에서 영화 출연료는 조금만 받고 주로 CF쪽에서 수입을 충당한다는 말을 배창호감독으로부터 언젠가 들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톱스타 안성기는 일본의 톱스타 다카쿠라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할까. 사실 영화계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일본영화계도 그 종사자들을 비롯해 어렵기는 한국과 유사하다.
안성기는 10년전 『만다라』를 찍을 때엔 아예 집에서 승복차림으로 나가곤 했다. 서울에서도 그랬고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삭발까지 한 터에 다른 차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승려여서 어쩌다 길가에서 지나치는 여인들 중에는 공손히 합장하고 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시치미 뚝 떼고 절했다.
그는 이때 맛들인 승려 차림이 몹시 흡족했던지 얼마 전에도 삭발 승려차림으로 어떤 모임에 나타난적이 있다. 아는 사람마다 고개를 끄덕하는 그를 대개는 당장 못 알아보고 30초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아보고 『아, 이거 누구야?』하곤 했다. 이때는 이광수 원작『꿈』(90년·배창호감독)을 찍고 있을 때였다.
『남부군』을 찍을 때는 종반부 게릴라 2, 3명이 남아 군경에게 쫓겨 도망하다 숨는 장면에서 얼음 계곡 물속에 10분쯤 들어가 있어 아주 혼났다. 화면시간으로는 불과 30초도 안되는 것이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카메라가 안돌아가 그렇게 오래 차디찬 산골 물속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특히 그때는 늦겨울이었는데 밑에 들어가 있는 얼음위를 군경들이 왔다갔다하는 장면이어서 잘못하면 압사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까지 있었다. 그후 근 두달동안은 찬물에 노출되었던 손이 얼얼하고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정도의 고생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면 다 겪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 배우들은 외국배우들에 비해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것 같다. 외국배우들 중엔 상당한 중년에도 아직 청년역을 거뜬히 소화해내고 그 이상의 효과까지 내고있는데 한국에선 아직 그것이 안되는 것같다. 그래서 이것은 배우 자신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는 배우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안성기는 10년전의 임권택·이장호, 그후의 배창호 박광수등 대감독 또는 신진기예의 감독들 작품에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것 같다.
그는 아직은 그저 훌륭한 배우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돈과 타협하지 않은 특별한 존재로 존경받게 될것으로 보인다.
배창호 감독의 신작 『천국의 계단』에서 50대 연예계 인사로 분한 안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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