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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질서 잡겠다" 당 총재직 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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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0월 유신 두 달 후인 72년12월 김일성도 새 헌법을 내놓았다. 48년9월 인민공화국 수립이후 첫 번째 개정이었다. 김은 주석자리를 새로 만들어 차고 앉았다.
김일성은 국가원수이자 군 최고사령관이 됐고 법령공포권, 특사권, 조약의 비준·폐지권을 틀어주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대체되어갔다. 유신이 「민주주의의 한국화」였다면 북한에서 일어난 일은 「공산주의의 북한화」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후락 부장이 평양에 가고 박성철부수상이 서울에 오면서 뭔가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생기는 모양이다. 전문가 증언을 모아보면 이러한 추측은 지나친 것 같다. 당시 정보부에서 북한관계를 담당했던 강인덕씨(현극동문제연구소장)는 『시기적으로 우연히 맞물린 것 뿐』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우연한 일치였을 뿐>
『북한은 50년대에 나름대로 사회주의개조작업(국가의 집단화)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60년대 10년간은 경제개발에 주력했지요 .
그러고 나서 60년 대 말부터 월남전에 자극 받아 대남 도발을 강화하기 시작했어요. 68년 1·21청와대습격, 68년 10월 울진·삼척 무장공비난동 등이 터졌잖아요. 북한은 그러면서 70년대에 인민민주주의 혁명단계에 들어간 거예요.
그때 등장한 것이 김일성주석제를 비롯한 헌법 개정인거죠. 유신 헌법이 없었더라도 김일성은 그대로 체제정비를 밀고 나갔을 겁니다. 배경도 그러했지만 남북대화메커니즘상 그런 종류의 남북교감은 있을 수 없는 얘기예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논쟁지역으로 들어가 보자. 유신을 준비하면서 HR(이후락)의 정보부팀은 『박대통령이 삼권을 다 맡게됐으니 공화당총재직을 버리고 초당적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일권 당의장·길전직 사무총장 등 공화당 팀은 『박대통령이 당을 떠나면 당은 무너진다』며 거세게 반발했다는 것이다.
정보부 사람들은 지금 『그때 박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자리를 버리지 않은 것이 유신 모순의 출발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보부 출신 Q씨의 증언.
『우선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은 당적을 갖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이 뽑은 대통령이 당적을 갖는 건 이상했지요. 거기에다 유신헌법은 박대통렁을 초당적 카리스마통치자로 만들자는 건데….
그래서 정보부에서는 계엄이후 야당의원을 설득할 때도 이렇게 말했어요. 「이 정권의 생리를 알아야한다. 이 정권은 총칼로 권력을 잡은 혁명정권이다. 이 사람들을 자극하면 또 한번 총칼혁명을 할 것이다. 그러니 최선보다는 차선을 택해야한다. 야당은 오히려 유신하에서 더 클 수 있다. 박대통령은 당을 떠나 초당적 통치사가 된다. 외교·국방만 박대통령이 하고 내정엔 야당도 낄 수 있다」고요.
결과적으로 거짓말한 셈이 되고말았지요.』
계엄선포이후 최규하 외교특보를 팀장으로 한 청와대 특별보좌관그룹은 정보부 사람들과 함께 유신정책을 만드는 작업을 한 일이 있다. 박종홍(교문)·박진환(경제)·장동환(사회)·장위돈(정치)·임방현(사회)·서종철(안보) 특보 등이었고 남산에선 전재구 특보가 끼었다. 이 그룹에서 대통령 당적 문제를 검토했으나 당과의 논쟁 끝에 「당적보유」로 결론이 났다.

<탈당거론에 당 펄쩍>
박대통령은 그래서 73년1월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새 헌법에는 대통령이 당직을 가질 수도 있고 안 가질 수도 있도록 되어있다. 나는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일에도 공화당 총재직을 그대로 가지고 앞장서겠다.
박대통령은 만의 하나 공화당총재직을 물러날 생각이 있었을까. 길전식씨의 설명은 「N0」다.
『나는 박대통령도 내심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믿어요. 그런데도 정보부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유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그걸 추진한 것 같아요.
유신 때 정말 당은 완전히 물먹었었습니다. 계엄선포후 궁정동 안가회의에 가서 나는 정보부 사람이나 특보들한테 이렇게 주장했어요 .
「공화당을 문닫게 할 작정이냐. 여당이란 건 대통령을 총재로 모시고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요. 「정일권 의장도 박대통령한테 「공화당을 떠나시면 당이 약해져서 큰일납니다」라고 진언했고요.』 대체로 당이나 특보출신 중 상당수는 지금 박대통령 탈당이 비현실적인 이상론에 불과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정보부 Q씨는 여전히 『그 대목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79년 10·26 일주일전쯤인가 청와대 모인사한테 직접 들였어요. 박대통령이 그 사람한테 「내가 유신하면서 공화당총재직을 그대로 가진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아」라고 했었데요. 유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이른지 모르겠다. 역사엔 가정이 통하지 않으니 『박대통령이 유신하지 않고 75년 물러났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라는 물음도 신통하질 않다. 어쨌거나 유신은 있었고 우리는 지금 그 시대가 남긴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밟고 서있다.
이러한 제한 속에서도 유신을 역사의 피와 살로 만들기 의해 찬반론을 다시 한번 붙여보자.
시인 김지하씨는 74년 박정권이 「자생적 공산단체」로 규정한 민청학련에 연루돼 다른6인과 함께 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었다.
6인은 이철·유인태·김병곤·나병식·이현배 씨와 나중에 진짜로 사형이 집행된 여정남씨 등이었다. 김씨는 철저한 유신비판론자로 남아있다.
『박정희란 개인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그는 청렴하고 사심이 없었다」는 주장을 십분 받아들인다해도 그걸 역사적 측량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박정희 개인보다 유신이라는 공적인 물건을 봐야지요.
또 유신이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활력이 무기력보다 낫다는 주장을 하잖아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도 반대예요.
꼭 독재를 해가면서 중화학이다, 방위산업이다 몰아칠 필요가 있었습니까. 오늘날 뭐가 남았습니까. GNP가 올랐다고 하지만 농촌은 황폐해졌고 주변은 공해 투성이잖아요.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유신은 살맛 안 나는 일이었어요.
유신 경제팀의 소신과 반론도 확고하다. 70년대 중화학·방위산업을 주도했던 오원철 전청와대 경제2수석은 이렇게 주장했다.

<경제가 정치서 독립>
『제3자는 쉽게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가 보면 얘기가 달라져요.
유신전에 내가 상공부관리로 있을 때 보면 비효율적인 정치 때문에 경제사업에 걸리적 거리는게 많아요 . 정권이 선거 때문에 정치자금을 거둬야 하니까 민원성 사업이 많잖아요. 보통낭비가 아니더군요. 말도 안 되는 것도 「상부에서 관심이 있으니 통과시키라」는 거예요.
유신 전에는 정치가 경제를 그렇게 묶어놓았었지요. 그런데 유신으로 해서 경제가 독립한거죠. 특히 선거 망국병이 사라졌어요. 그때 우리가 갈 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원이 있나요, 아니면 기술이 있었나요.
풍부한 노동력과 교육열을 한 군데에 모아 중화학을 일으켜야하는데 그 점에서 유신은 대단히 효율적이었어요. 물론정치는 피해본 점이 있겠죠. 하지만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한꺼번에 잡나요.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10·26후 12년이 지난 지금 유신옹호론이 만만치 않게 등장하고 있지만 유신은 세인의 기억 속에 여전히 어두운 구름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역사나 세월이 앞으로 이 구름을 얼마나 걷어낼지 지켜볼 일이다. <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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