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기자의오토포커스] '한국형 자동차'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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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최근 스위스 제네바모터쇼 취재 때문에 유럽에 간 김에 여러 곳을 들러봤습니다. '자동차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반영한 문화 상품'이라는 것을 실감한 출장이었지요.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도시마다 정방형의 돌을 빼곡히 박아 만든 돌길이 있습니다. '벨지움 로드'라고 부르죠. 왜 돌을 박아 길을 만들었냐고요? 마차를 끌던 말이 거리에서 수도 없이 용변을 봤고 ,이를 쉽게 닦아내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지금의 아스팔트 대용인 셈이죠.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은 실내에 바깥 소리가 살짝 들려오게 차를 만듭니다. 예전 마차를 탈 때 돌과 바퀴의 마찰 소리가 들린 것처럼 운전하면서 도로와 호흡을 한다는 겁니다. 반면 도요타 렉서스는 문들 닫으면 외부와 단절감이 들 정도로 정숙합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다운 차라고 할까요. 돌길인지 포장도로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유럽의 소비자들은 "정숙성은 뛰어나지만 도로와 대화가 차단돼 차가운 느낌이 난다"고 평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연두색 푸조 307과 빨강 르노 메간은 딱 어울렸습니다. 앞바퀴에서 범퍼까지의 거리(오버행)가 길어 피노키오 코를 연상시키는 푸조의 유선형 자태나 풍만한 여인의 뒷모습을 연상시키는 르노 메간 같은 차들은 파리와 찰떡 궁합이었죠. 거대한 벤츠 S클래스나 에쿠스 같은 차들이 이 거리에 있다면…. 생각만 해도 어색합니다. 이번에는 독일입니다. 시속 200㎞ 이상 질주할 수 있는 아우토반에선 푸조.르노는 왠지 연약해 보입니다. 균형미와 절제미(짧은 오버행이 특징)를 내세운 벤츠.BMW.아우디가 제격이죠. 액셀을 밟으면 쏜살같이 반응하고 브레이크는 정확합니다. 사이드 미러에 포르셰의 둥근 헤드라이트가 보이면 달리던 차선을 얼른 비켜 줘야 하죠.

미국은 어떨까요. 고속도로는 잠깐 졸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을 만큼 끝 없는 직선입니다. 미국인들은 자동차로 수천㎞를 달려 대륙을 횡단하곤 합니다. 장시간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덩치도 커야 하고 의자는 푹신합니다. 잽싼 코너링보다는 편안한 승차감이 중요하죠. 그리고 시속 200㎞ 이상 달려야 할 일도 별로 없어 넉넉한 힘이 나오는 큰 엔진을 단 차가 인기였지요. 특히 예전 캐딜락이 그렇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높은 벨트라인(도어 윈도의 높이)에 몸을 숨기고 슬쩍 창문을 내려 바깥 세상을 보는 그런 멋이죠.

그럼 한국 도로에는 어떤 차가 어울릴까요. 가장 많이 팔리는 쏘나타.아반떼일까요. 한국엔 전통 기와집이 몰려 있는 지역도, 옛 정취를 느낄 흙길도 드뭅니다. 신도시건 농촌이건 모두 거대한 아파트 단지입니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는 뉴욕보다 더 번잡하고 도로도 넓습니다.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느낌이 확 전해지죠. 그런데 이런 다이내믹한 거리와 궁합이 맞는 차는 없어 보입니다. 현대.기아차의 숙제인 셈입니다.

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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