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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서울대는 '우물 밖'으로 나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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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후세의 역사가는 매년 열병을 앓는 우리 시대의 입시 문화를 신분제 매매 경쟁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양반 신분을 돈으로 샀던 것처럼 입시도 고액 과외나 입시학원을 통해 살 수 있었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신분제 획득 경쟁에서 탈락한 조선의 빈농(貧農)들이 민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이 경쟁에서 탈락한 우리 시대의 빈자(貧者)들도 가난과 증오를 대물림하면서 사회의 위험 요소가 되었다고 분석할지도 모른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우리 교육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획일적인 신분 획득 수단으로 변형되었다. 그런데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었던 조선의 양반들이 외세 앞에 극도로 무력했던 것처럼 국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지닌 서울대도 국제 무대로 나가면 무력하기 그지없다.

서울대에서 즐겨 인용하는 과학논문인용색인(SCI) 지수에 따른 2001년도 세계 대학 순위는 당당한(?) 40위였다. 그러나 2002년 초 서울대 교수협의회가 'Blue Ribbon Panel 보고서에 대한 견해 및 성명서'에서 "서울대가 SCI 학술지에 눈을 돌려 다른 지면에 앞서 여기에 집중적으로 발표할 필요에 착안한 것은 1996년께의 일"이라고 자백(?)하고 있는 것처럼 이 순위는 한국 교육의 병폐를 국제로 확장한 족집게 벼락 연구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SCI 자체가 미국과학정보연구소(ISI)라는 민간 연구소가 선정한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나 MIT.칼텍 등 미국 명문대의 SCI 랭킹이 상위가 아니며 독일.프랑스 등은 SCI에 관심도 없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자. 98년 4월 교육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울대가 아시아권 16위 수준이자 세계 8백대 대학에도 들지 못한다'고 지적했으며, 2002년 9월 김정숙 의원이 배포한 국감 자료는 7백위권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안방 대감 서울대의 국제적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담한 국제 위상이 드러날 때마다 서울대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예산 타령이었다. 앞의 서울대 교수협의회의 성명서는 서울대 예산이 하버드대의 13분의1이고, 대학 자체 발전기금은 하버드대의 1백83분의1, 미시간대의 30분의1에 지나지 않는다고 대응했다.

그러나 연간 수천억원의 세금을 지원받는 서울대의 예산 타령은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었던 조선조 양반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하버드대나 미시간대의 발전기금이 자체 모금의 결과라는 점은 왜 애써 외면하는가?

35세 때부터 40여년간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하버드대의 기틀을 세운 찰스 엘리엇 총장은 하버드대 출신 교수 채용을 철저하게 제한했다. 동종교배는 열성을 낳는다는 상식의 실천이었지만 서울대는 신라 말의 진골들처럼 동종교배로 일관한 결과 다른 대학 출신의 서울대 교수 채용을 뉴스거리로 만들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서울대의 참담한 국제 순위인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부유층 자제들이 몰려 있는 서울대에 더 이상 국민 세금을 쏟아부어선 안 된다. 해법은 오히려 그 반대다. 서울대는 더 이상 '서울대특별법' 같은 진골적 발상이나 국립이란 온실에서 벗어나 동문들을 중심으로 이사회를 구성해 행정적.재정적으로 독립하라.

그 토대 위에서 서울대에 지원했던 수천억원의 세금을 뼈를 깎는 노력으로 특성화, 세계화에 성과를 거두고 있는 대학들과 연구소에 집중 지원한다면 우리 대학의 진정한 경쟁은 그때 시작될 것이며, 일제시대의 황민화 교육과 해방 후 군사문화의 왜곡된 잔재인 획일적인 우리 교육구조의 정상화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그것도 혁명적으로.

이덕일 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