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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 발발 4년 … 전쟁은 미국이 실속은 이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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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7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30㎞ 떨어진 마모디야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폭발로 주민 2명이 부상했다. [마모디야 AP=연합뉴스]

이라크가 거대한 수렁으로 변하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3년 3월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어 미국은 지난 4년간 이라크에 미군 14만 명을 주둔시키고 전비를 5000억 달러나 쏟아 부었지만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지금 이라크 저항세력과 국내외 반전 여론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신세다. 20일로 전쟁 발발 4주년을 맞는 이라크 상황을 짚어 봤다.

17일 낮 미국의 수도 워싱턴 시내 링컨 기념관 앞에는 1만여 명이 운집했다. 영상 3도의 쌀쌀한 날씨에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부는데도 미국 각지에서 대규모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이들은 손에 '이라크 조기 철수' '이란과의 전쟁 반대' '대통령 탄핵'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반전(反戰) 시위를 벌였다.

20일로 4년이 되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대의 합창은 그다지 멀지 않은 백악관 앞까지 울려 퍼졌다. 아들이 이라크전에서 목숨을 잃은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크로퍼드 목장 앞에서 오랜 기간 농성을 한 '반전 엄마' 신디 시핸은 연설에서 "우리는 전쟁기계의 그늘 밑에 있다"며 부시 행정부를 성토했다. 그는 "그들(부시 행정부)은 죽음과 파멸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며 "우리가 그걸 저지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시위대는 이어 포토맥 강 위의 알링턴 메모리얼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5㎞가량 떨어진 펜타곤(국방부) 북쪽 주차장 앞까지 가두행진을 했다.

이날 시위는 40년 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대규모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시위를 주도한 진보단체 '앤서(Answer) 연합' 측은 "이라크전에 대한 여론이 바뀌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시위"라고 밝혔다. 40년 전처럼 시위의 위력을 과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겠다는 뜻에서 이번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1967년 10월 21일 토요일.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대 5만여 명이 링컨 기념관 앞에서 펜타곤 앞으로 행진했다. 히피족(hippie.60년대 중반 물질문명과 국가기관의 통제를 혐오하며 징병 기피, 반전을 주장한 자유주의자)이 대거 참가한 시위대는 펜타곤 정문 앞 광장에서 헌병.경찰과 유혈충돌했다. 시위대 중 과격파가 펜탄곤 진입을 시도하려다 소총을 든 헌병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해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7일의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경찰은 시위금지선을 넘은 5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은 없었다. 링컨 기념관 왼쪽의 도로 건너편에선 소규모의 이라크전 찬성 시위가 벌어졌다. 참전 용사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자유주의자들이 적을 돕고 있다"며 반전 시위를 비난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부시 대통령=부시 미국 대통령은 17일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에 경고를 했다.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의회는 우리 군대에 대한 긴급 예산지원법안을 조건 없이 승인해야 한다"며 "만일 다른 법안이 나에게 온다면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민주당이 연방하원에서 처리하려 하는 이라크 미군 조기 철군 법안(내년 9월까지 철군)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런 가운데 미 육군은 16일 2600명의 장병을 이라크로 보냈다. 부시 대통령은 2만6000명의 미군을 이라크에 증파하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고민은 깊다. 이라크 상황이 호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AP통신은 최근 미 국방부의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지난해 10~12월 이라크 상황을 평가한 이 보고서는 "종파 간 폭력, 주민 피란 등의 일부 요소는 내전에 걸맞은 것"이라 적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줄곧 부인해 온 '내전'이란 말이 이제 행정부 내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부시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이라크 미군의 사상자가 늘면서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15일 현재 미군 전사자 수는 3240명, 부상자 수는 2만3924명이다. 전쟁 비용은 500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국민은 절망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17일 "2001년 9.11 테러 직후 90%이던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제 30%를 조금 넘는다"며 "그는 국민의 신뢰를 급속히 상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그의 지지율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의 28%보다 낮아질지도 모른다.

우방국도 부시 대통령을 버리는 형국이다. 맹방인 영국조차 이라크에서 떠나겠다고 했다. 외교학으로 유명한 터프츠 대의 리처드 아인버그 교수는 "해외에서 미국의 위상이 이렇게 떨어진 적은 역사상 없다"며 한탄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현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에는 '이란 붐'이 일고 있다. 토마토와 밀가루 같은 생활필수품은 물론 에어컨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이란산 제품이 이라크를 점령한 것이다. 전쟁은 미국이 하고 열매는 이란이 따는 격이다.

◆안전한 무역로=이라크 치안 상황이 외국과의 정상적 무역을 허용치 않는 것이 원인이다. 이라크와 1000㎞가 넘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이 쉽게 물건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되고 있다. 전후 이라크의 상품 진입로는 요르단과 터키를 통한 육로였다. 그러나 저항세력의 공격에 이어 종파 간 충돌이 격화되면서 수니파 저항세력의 거점인 이라크 서부와 북부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시아파 밀집 지역인 동부가 가장 확실한 무역로로 부상했다.

그 결과 이란에서 생산된 푸조 자동차는 수니파 저항세력이 없는 동부 국경을 통해 이라크 전역으로 팔려 나가고 있다. 바그다드 시내 전자상가에는 발전기로도 가동할 수 있는 이란제 수랭식 에어컨이 중국과 한국 제품을 밀어내고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란 제품 수입이 매년 30% 정도씩 늘고 있다.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관은 "이란과의 교역이 이라크 전체 수입의 20% 정도를 웃돌 것"이라고 평가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이란과의 무역이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증가세다.

◆'돈줄'이 된 이란=양국 간 교류 확대의 더 확실한 배경은 정치.종교적 유대 강화다. 미국의 감독 아래 치른 선거를 통해 국민 65%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 이란과의 관계가 급속히 호전되고 있다. 이란과의 전쟁(1980~88)까지 치른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한 이후 이라크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영향력 아래 급속히 편입되고 있다.

벌써 정상회담이 열리고 실무 경제협력 방안이 쏟아져 나왔다. 2005년 7월 시아파 출신 이브라힘 알자파리 이라크 총리의 방문을 계기로 양국의 경제 관계는 본격화했다. 이란은 1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제의했다. 고유가로 벌어들인 오일 달러의 일부를 어려운 이라크에 내놓은 셈이다. 아직 미국의 눈치를 보며 돈을 받아 써야 하는 시아파 이라크 정부에는 숨통이 트이는 소식이었다.

특히 이라크 중남부의 시아파 지역 경제는 이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남부의 유전도시 바스라만 해도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이란에서 전력을 공급받는 등 지난해 총 4500만 달러에 달하는 상품을 수입했다. 이란은 시아파 성지가 있는 중남부 도시에도 '돈줄'이 되고 있다. 이란 정부는 순례객들을 위한 관광시설 개선 명목으로 나자프주에 매년 2000만 달러를 지급하고 있다. 시아파 도시인 카르발라주도 같은 명목으로 매년 약 300만 달러를 이란으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이 두 도시에는 또 매년 수만 명의 이란 성지 순례객이 찾아온다. 이들 도시엔 이란이 생명줄인 셈이다.

◆경계하는 미국=이란-이라크 접근은 워싱턴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바그다드 주재 미 대사관 측은 "양국 간 교역 증가는 긍정적"이라면서도 "안보 문제와 무관한 통상적인 경제활동이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미국의 '방해 작전'도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했다. 이라크 남부 주(州) 정부들은 대규모 공사를 이란 건설사들에 발주하고 있지만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제지로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자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은 또 이란이 저항세력에 각종 무기와 폭발물을 제공한다며 바그다드.아르빌 등에서 이란 관리들을 체포해 왔다.

그러나 양국 간 정치.경제적 관계가 강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아파 정권이 등장한 이라크에 대해 다른 수니파 아랍국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주도의 점령이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라크 인구의 과반수가 이란에 기대려는 분위기다. 누리 알말리키 총리 자문역인 사미 알아스카리 의원은 "시아파는 자기 것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대부분 이란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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