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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열반한 월하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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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4일 오전 열반한 통도사 방장 월하(月下) 스님은 구한말 구하(九河)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선승이다.

1954년 효봉.청담.인곡.경산 스님과 함께 사찰정화 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난 50여년간 조계종 내부의 정화와 선풍(禪風) 진작을 위해 부단히 정진해 왔다.

스님은 평소 소탈한 성품과 엄격한 수행으로 유명했다. 통도사 방장이란 최고 위치에 있으면서도 80대 중반까지 손수 자기 빨래를 하는가 하면 독상(獨床)을 거부하고 항상 다른 스님과 함께 공양(식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방 청소도 직접 했으며, 평소 대중교통 수단을 자주 이용했다.

"항상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고 대중에게 지탄받지 않게 수행하라"는 스승 구하 스님의 말을 평생 실천한 것이다. 고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출가자가 각성하고 수행에 전념하지 않으면 한국 불교의 맥이 끊어질 것이라고 경계해 왔다.

스님은 생활 속의 불교, 중생 속의 불교를 강조했다. 중생에게 무엇인가 구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되게 원력(願力)을 세우고 실천하라고 주문했다. 도둑을 제도(濟度.보살이 중생을 어려움에서 구해 극락세계로 인도함)하려면 같이 도둑질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고인은 어떤 자리에서도 격의 없는 법문을 펼쳤다. 스님이 소위 무당절이라고 불리는 이름 없는 작은 절에 가는 것을 보고 시자들이 말리자 그는 "여기도 부처님이 있는 곳이니 법문을 해야 한다"며 물리쳤던 일화도 있다.

반면 자신은 소식(小食)을 철저히 지키는 등 계율을 실천하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상좌였던 흥법 스님이 지병으로 고생하던 때 주변에서 "흥법의 병 치유를 위해 육식을 권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하자 월하 스님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사찰의 중으로서 계율을 어길 수 있겠느냐"고 뿌리친 적도 있다.

고인의 공적 중 통도사를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로 키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불교의 엄격한 수행 전통을 되살리는 한편 한국 최고의 사찰 박물관을 건립하고 인터넷 포교를 활성화하는 등 지난 50여년간 통도사의 안팎을 굳건히 다져왔다.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은 "방장 스님은 영축산의 꿋꿋한 소나무처럼 통도사를 지켜온 거목이며, 통도사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했다. 통도사 서울 포교당인 구룡사 주지 정우 스님도 "큰 스님은 열반에 드시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외출도 하시고 대중 앞에서 화두를 일갈하시는 등 생사의 갈림이 다르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셨다"고 밝혔다.

고인은 종정 말기 시련도 겪었다. 98년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월주 스님과 종단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이다 총무원을 점거토록 교시했다. 고인은 이런 와중에서 소집된 전국승려대회에서 종정 불신임을 받아 물러나야만 했다. 또한 통도사도 총림에서 해제됐고, 방장직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일종의 '불명예 퇴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2001년 '참회'라는 단어를 써가며 "98년 종단 사태의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며 종단 화합을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해 가을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고인이 통도사 방장에 재추대된 것도 이 같은 이력과 공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호 기자

임종게(臨終偈)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一物脫根塵)

우주만물이 법신을 드러내네(頭頭顯法身)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莫論去與住)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處處盡吾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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