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개방 무책이 상책인가/한남규 외신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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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아시아­태평양경제각료회의(APEC)가 끝난후 정부내에서는 PR문제를 놓고 내부적으로 좀 시끄러웠던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홍보를 어떻게 했길래 회의에 대한 여론이 온통 부정적으로 기울어졌느냐는 자체비판이 부처간에 오갔다는 것이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언론을 비롯해 일반여론은 한결같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수출부진이다,국제수지적자다 하는 판국에 일껏달러를 쳐들여 국제회의를 마련해놓고 기껏 한국시장개방압력이나 집중적으로 받았다는게 불만의 요지였다.
○잔치벌여놓고 욕만
실제로 태평양연안국가들의 경제협력문제를 다루기로 하여 열린 이번 회의에서는 경제문제로는 쌀수입시장 개방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국민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쌀이라고해 개방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며 회의주최국 한국을 매정하게 몰아붙인 미국통상대표부(USTR) 칼라 힐스에 대해서는 거의 적개심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됐던 것 같다. 칼라 힐스를 빗대 「칼날」이라는 노골적 수식어가 언론에 등장했고 흔히 만평의 꼬집히는 대상이 됐다.
회의기간이 한정돼 있었길래 망정이지 며칠만 더 계속되었더라면 분위기는 훨씬 더 상서롭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안보,요새 와서는 통상도 포함한 근본적인 이해가 얽혀있기 때문에 쉽사리 흔들릴 수 없는 것이지,솔직히 말해 정서적으로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금세 멀어질 수 있는게 사실이다.
67년 1·21사태가 벌어져 청와대가 김신조 일당의 공격을 겨우 모면,대공방위의 큰 구멍이 뚫렸을때의 일이다. 그 일로 남한이 온통 벌집 쑤셔놓은 듯 흥분하고 있었을때 미국의 조야와 언론은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이틀후 동해에서 미해군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되자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무책임한 정부대책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본스틸 대장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그는 『우리에게 안보공약을 다짐해온 당신들은 우방 대통령의 목숨은 대수롭지 않고 소형선박은 그토록 귀중하냐』고 국가원수로서는 걸맞지 않게 감정을 폭발시켰다.
70년대 중반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했다하여 수개월간 미 여론을 들끓게 한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에 대해서도 당시 적지 않은 한국인은 「양×들을 떡 주무르듯 조종할 수 있었던」그의 수완을 크게 평가까지 했던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특성을 가진 양국관계의 성격을 고려할때 쌀수입개방문제는 훨씬 책임있는 정부의 대책이 요구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요새 우리정부가 쌀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정부의 어려운 입장은 이해하지만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시정잡사에서는 「무책이 상책」이란 말이 통용될 수 있을지 모른다. 종종 몇가지 품목의 수입시장문제와 관련해 난감한 형편때문에 무책으로 대응했던 일도 없지 않았다.
요새 농림수산부장관도 그렇고,기획원장관·국무총리,제네바에 나가 있는 대표도 그렇고,이른바 정책당국자들은 예외없이 쌀수입문제에 관해 입만 열면 『개방하지 않겠다』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강조해 「개방불가」발언을 되풀이한다고 해서 이들이 과연 책임지고 쌀수입을 끝내 저지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백성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정은 우리와 다르지만 일본은 정책 책임자들이 좀더 현실적이고 용기가 있다.
사실상의 자민당 최고실력자 가네마루신(금환신)전부총재가 『외국쌀은 한톨이라도 수입할 수 없다』고 다짐해온 자민당의 입장을 깨뜨리고 최근 쌀개방의 「총대」를 들었다. 『미국에 수백만대의 자동차를 내다파는 일본이 더이상 쌀수입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만도 없이 구호만
차기총재로 기대되는 전간사장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의원도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이번에도 깨지면 쌀수입을 반대한 일본은 협상결렬의 책임을 지우는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지적,서슬이 퍼런 농민들에게 개방불가피론을 감히 제시했다. 일본정부 일각에서는 이미 농민에 대한 보상등 개방사후대책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들리고 있다.
통상협상에서 어느 나라도 고분고분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쌀문제뿐 아니라 다른 품목의 자유무역에 관해 한국을 상대로 얘기하면서 답답해 하는 대목은 「무책」으로 개방반대입장만을 일관하는 정책당국자들의 자세로 알려져 있다.
엎어치나 메어치나 마찬가지 얘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미국이 쌀개방과 관련해 주장하는 점은 한국이 즉각 시장을 개방하라는게 아니라 개방의 「시간표」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소위 「정책」당국자들은 쇠고기 때도 그랬고,담배때도 그랬듯이 「수입불가」를 국민들에게 거듭 다짐하면서 버티는데 시간과 정력을 쏟다가 별로 사후대책도 없이 개방조치를 취할때는 책임을 외국의 압력에 뒤집어 씌워왔다. 말하자면 외국압력은 겉으로는 저항대상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사회분위기나 정치상황때문에 취하기 어려운 개방조치를 실행에 옮기는 무기로 우리 정부에 의해 활용돼온 것이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됐다.
만의 하나 대안모색도 없이 개방불가 구호만 되풀이하다가 칼라 힐스에게만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한다면 그것이 책임있는 정부의 정책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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