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의 벽 한걸음에 넘을 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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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서울토론회(25∼30일 서울 라마다올림피아호텔)가 나에게는 「북한의 여성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심 있는 일이었다.
분단 이후 민간 여성대표가 최초로 판문점을 넘는 날, 우리의 선배들이 북측의 대표들과 동창생으로, 옛친구로 얼싸안은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갈증처럼 타오르는 조바심을 삭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소꿉친구로 정을 나눈 이 세대들이 살아있을 때 우리는 서로 만나기라도 해야 한다.
25일 베풀어진 환영 만찬은 참석자 모두를 큰 기대에 부풀게 했다. 각국(남북한, 일본)의 대표들은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나눴고, 여흥 순서에서는 함께 어울려 춤도 추고 손에 손잡고 목청껏 통일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제 여성들의 힘으로 통일의 다리를 놓게 되려나 하는 부푼 마음으로 모두들 자리를 떴다.
26일로 이어진 서울토론회는 오전에 「가부장제 문화와 여성」(조형·이대교수)을 주제로 발표가 있었다.
우리측은 기존의 가부장제 문화가 남북분단으로 인한 군사적 부담으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역할에 큰 장애요소가 돼왔다고 했다. 그러나 토론에 나선 북측대표는 북에서는 남녀가 완전한 평등을 이루었으며 모든 여성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부터 남북 여성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벽을 보면서 전날 밤의 열기가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통일과 여성」(정명순·조선민주여성동맹중앙위위원)이라는 주제로 북측 대표의 발표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북측은 연방제 통일 방안의 완벽성을 주장하면서 「통일의 영웅」으로 임수경을 언급할 때는 목이 메고 눈물까지 삼켰다. 우리측 토론자는 한민족 공동체방안에 대한 입장을 전개했다.
나는 남과 북 사이에 팽팽하게 뻗어있는 평행선을 여기서도 지켜보면서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래, 우리는 지금 46년만에 만났다. 반세기 분단사의 벽을 어찌 단숨에 허문단 말인가. 「같은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너뜨리기에는 분단의 벽은 너무 높고 두껍다.
그러나 이제라도 서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이 이렇게 높고 두꺼움을 피차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미 있는 출발을 한 셈이다.
아쉬운 마음 또한 어찌하랴. 이 만남이 피차의 입장을 주장하는데 그친 모임이 아니라 이념이나 제도를 초월하여 남북간에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동질성을 발굴하고 작더라도, 그리고 여성들만이라도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동료 교수들과 금년에 펴낸 『북한의 여성생활』을 북측 대표들에게 선물하면서 책장에 이렇게 썼다.
『가보지도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통일의 염원으로 이 연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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