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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엎드려보자/조두영(시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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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럽 큰 나라들의 전쟁박물관에는 으레 수백년된 두툼한 철갑복이 수십벌 죽 걸려있는데,나 같은 동양인은 입다가 주저앉을 정도로 그 무게가 엄청나게 보인다. 그런데 같은 전시실 한구석에는 마치 비교라도 하라는듯 비슷한 연대의 동양 장수 전투복 한벌이 또한 빠지지않고 걸려 있어,자세히 보면 이것은 광목 누비옷 겉에 얄팍한 쇠붙이를 듬성듬성 붙인 경량급이다.
군사전문가들이 꼽는 인류 최대의 전투는 43년 7월 독소간의 쿨스크대회전이다. 이때 독일군은 전번 스탈린그라드 패전을 만회키 위해 이 러시아 대평원지대에 비행기 2천대와 탱크 3천대를 집어넣고 공격을 시작했지만 비행기 3천대와 탱크 5천8백대로 맞받아친 상대앞에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었다. 어마어마한 기갑전으로서,이렇듯 서양인은 우람한 체격에 걸맞은 철갑싸움에 능하다.
○기갑전에 능한 서양
그보다 4년전 내몽고 벽지에서 있어던 소일간의 전투를 소련에서는 칼킹골전투로,일본에서는 노몬한 전투로 불리는데 병력에서 3대 2,기갑화력에서 네배로 우세했던 소군의 승리로 끝났었다. 쿨스크와 이 두곳 모두의 지휘관이었던 주코프는 뒤에 『기갑에 약한 동양인의 허를 찔렀더니 열흘만에 나가 떨어지더라』고 말했다 한다.
사냥으로 주식을 얻던 서양과는 달리 농업을 주로한 동양쪽은 싸움 역시 지리를 누가 더 잘 이용하는가로 귀결을 본 때가 많았으니 기습전·위장술·산악전·땅굴작전·지구전같이 납작 엎드려 땅을 비비고 하는 싸움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요즘에는 묘하게도 인간집단들의 경쟁이 우직하게 치고 받는 육체전투에서 경제전쟁·무역전쟁·전자전 방향으로 세련화되고 있다. 현대판 기갑산업인 전자산업에 한국도 미일을 따라 뒤늦게나마 한다리 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차차 동양인이 지닌 아담한 체구와 작은 손,긴 허리가 의자에 앉아 주물럭대는 컴퓨터작업같은 전자산업에 안정맞춤이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즉 땅의 노예가 되고 땅에 기대어서만 지낼 필요가 없는 시대를 맞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가진 땅과 흙에 대한 미련과 집착은 아직도 대단하다. 성인인구 반이상이 당대에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왔지만 생활체질상의 물갈이가 덜 된데다가 고향을 등졌다는 죄책감에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도시 고층건물 숲속에서 「농자천하지대본」의 깃발밑에 귀가 떨어지게 꽹과리를 치고 있으며 도심 보도블록 틈바귀에서까지 흙구경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상태에 있다.
심지어는 잘 팔리는 책 제목도 『토지』·『산맥』·『땅』·『밥』 같은 것이다. 그뿐이랴. 동양의 네마리 용가운데 유독 한국용만 승천을 거부하고 낙지하지 않았던가.
○엄청난 쌀개방 압력
일찍이 프로이트는 남자란 세사람의 여자에게 기대야 하는 운명이라면서 어려서는 어머니,커서는 아내,죽어서는 몸을 묻힐 「대지라는 어머니」를 들었었다. 즉 땅이란 정신분석적으로 어머니의 상징이니,땅을 떠난다는 것은 어머니품을 잃는다는 뜻도 된다.
서양에서는 이탈리아 남자가 그렇다고 정평나 있듯 한국 남자들도 아내말보다 어머니 말 더 잘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십여년까지 농업민족이었던 우리로서 UR협상에서 받는 쌀개방 국제압력은 「돌아갈지도 몰라 남겨둔 정든 시골집을 완전 처분하고 몽땅 공장지대로 집단이주하라」는 의미로 들려온다.
그러나 압력을 가하는 쪽 논리는 이와는 약간 달라 「자,이젠 당신도 어른이 되었으니 어머니생각 그만하고 아내(국제무역)을 돌봐야지」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싫으면 아내를 포기하고 어머니에게 돌아가라고 달래고 어르고 있다. 그러니 국가발전단계로 보아 말기청소년기에 해당되는 우리로서는 자신을 어린이라고도,어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이런 판국이니 어느 재수없는 분이 UR 최종협상 테이블에 한국대표로 가 앉을는지 측은하기 그지없다. 사태는 마치 로일전쟁 강화회담에서 일본 가쓰라(계) 내각 전권대사가 겪었던 바와 비슷할 것 같아서다. 당시의 일본군은 예비병력과 국고가 바닥나 전쟁이 몇달만 더 계속되면 거꾸로 수세에 몰리게될 지경이었건만 이런 국가비밀을 모르는 국민과 언론은 상대에게서 더 많이 받아내지 못했다고 대표를 매국노 취급하며 닦달했던 것이다.
○현명한 차선책 필요
2백만 국민이 삽시간에 개방반대 서명한 것을 알면서도 조심조심 입을 열다 닫고,또 닫다가도 여는 모습을 엊그제 귀국한 우리 실무협상 대표와 주미대사에게서 보고 많은 국민들이 정부당국의 고충을 알아주고 있다. 쌀개방문제는 이제 더이상 정권차원으로만 볼 문제가 아니다. 돌아가는 국제조류로 볼때 야당·재야가 설령 정권을 맡는다 해서 더 잘 처리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여건만 허락하면 정부 당국자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반대서명을 했으리라는 것쯤은 대다수 국민이 짐작하고도 남는다.
식량무기화 가능성에 겁도 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일본까지 반쯤 손든 마당이니 우리도 차선책을 마련하는 등 현명하게 처신하자. 그리고 앞에는 핵을 가질지도 모르는 북한,뒤에는 기갑력을 갖고 통상제재에 나선 미국과 EC로 포위된다는 극한 상황을 한번쯤은 그려보자.<서울대 의대교수·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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