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말장난으로 위안부 책임회피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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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괘씸하다. "종군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다"고 깨끗이 시인하면 될 일이지 왜 '광의의 강제성'과 '협의의 강제성'으로 군색하게 나누어 한쪽을 부인하는가.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1993년의 고노 담화를 계승하면 계승하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계승한다"며 토를 다는 심사는 또 무엇인가.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좀스러운 어법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근본적으로 종군위안부에 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인식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아베 총리는 그제 일본 참의원 답변에서 종군위안부 동원에 대해 "관헌이 집에 들이닥쳐 납치하듯 끌고 가는 것 같은 강제성은 없었다. 협의의 강제성을 뒷받침할 만한 증언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업자가 사실상 강제력을 행사한 사례는 있을 것이다. 광의로 해석하면 강제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애매하게 둘러댔다. 고노 담화를 '기본적으로' 계승한다고 마지못해 밝히면서도 "미국 하원에 제출된 종군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채택되더라도 사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뻗댔다.

이러니 일본이 아무리 사죄했다고 주장해도 전혀 사죄받은 느낌이 들지 않고 거꾸로 부아만 돋는 것이다. 게다가 총리 발언 직후 집권 자민당의 나카가와 쇼이치 정조회장이 고노 담화를 수정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으니 일본의 태도를 더더욱 믿기 어렵게 됐다. 우리로선 고노 담화로도 부족한데 말이다.

종군위안부 동원에 대해서는 유괴.납치.인신매매.협박.취업사기 등 온갖 수법이 자행됐다는 연구 결과도 이미 나와 있다. 피해자의 증언과 직.간접 증빙자료도 많다. 무엇보다 피해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뜨고 있는 마당에 '광의'니 '협의'니 말장난이나 일삼는 아베 총리의 태도에서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아베 총리의 발언에 아시아는 물론 서구 언론들까지 비판을 쏟아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총리 자신이 곰곰이 성찰해 보라. 역사를 자의(恣意)로 재단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