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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사회의 행복지수(유승삼칼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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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월초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도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스웨덴의 아동복지제도에 얽힌 한 사건을 제시해 주고 있다. 미국의 보수적 견해를 대변하고 있는 대표적인 대중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기사가 의도했던 바는 스웨덴의 복지제도를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시비비에 앞서 사건에 관련된 스웨덴의 아동복지제도는 우리들에겐 우선 부러움으로 다가온다.
○스웨덴의 아동복지
사건의 내용은 대강 이런 것이다.
아홉살짜리 사내아이를 맏이로 2남1녀를 둔 올손부부가 장남의 지능발달이 더디다고 생각해 어느날 아동복지당국에 도움을 청한다. 당국은 전후사정을 심사한 끝에 이 부부에겐 자녀교육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즉각 가정치료사를 파견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당국이 한걸음 더 나아가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는 이 부부의 가정생활도 재편성할 것을 요구하면서부터 당국과 올손부부간의 갈등은 시작된다. 부부가 당국의 조치에 반발해 가정치료사가 집에 오는 것부터를 거부하자 일은 더 커진다. 아동복지당국은 이로 미루어 부모에게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더 굳히고 아예 세자녀 모두를 부모에게서 떼어 보호조치한 것이다.
올손부부는 법정투쟁을 벌여 장남은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네살과 22개월된 아래 두 아이는 되찾지 못했다. 그동안 당국이 지정한 양부모에게 맡겨졌던 두 어린이를 바로 생부모에게 돌려보낼 경우 정신적 혼란과 정서적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당국의 판단이어서 잠정적으로 양부모의 보호아래 더 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필자가 스웨덴의 국가권력의 지나친 비대화가 낳은 폐해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야 어떻든 우리들은 이 사건을 통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는 아동의 건전한 양육은 부모의 책임만이 아니라 국가가 함께 져야할 책임이며 국가엔 그에 대한 권리마저 있다는 인식이 스웨덴 사회에는 확고히 뿌리내려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개입이 지나쳤느냐,지나치지 않았느냐의 문제는 별개로 스웨덴 정부의 아동에 대한 보호조처가 기민하고,그 심리적 충격까지 감안할 정도로 섬세하며 세련돼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기사의 소재가 스웨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아동의 복지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책임의 자각은 유럽각국에 거의 공통된 것이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필자의 나라인 미국에서도 역시 어린이는 친부모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철저히 보호받아야할 독립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이민간 우리 교포가 자기자녀를 우리나라에서처럼 마음놓고 때리다가 이를 목격한 이웃에 의해 고발된 사례는 이미 우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모두의 책임
친부모의 권리를 제한할 정도로 국가가 아동의 권리와 복지에 민감하다면 문제가 있는 가정의 어린이나 버림받은 어린이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과 배려가 어떠하다는 것은 별도의 언급이 필요없을 것이다.
적지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선진각국의 이러한 아동복지제도가 그 사회의 경제력이 충분히 성장한 뒤에야 채택된 것으로 생각하고들 있다. 그러나 선진각국의 복지제도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들 나라의 아동복지제도가 1만달러,2만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이 이루어진 뒤에야 마련된 것은 아니다. 거의가 지금부터 반세기도 더 전에 그들의 경제수준이 우리의 현재보다 훨씬 더 낮은 수준에 있을때 그것을 확립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적 능력의 문제이기 이전에 복지에 대한 정책의지와 그를 가능케하는 사회적 인식 및 그 사회의 지배적 이념의 성격에 있는 것이다.
서커스소녀의 비극이 알려지자 경찰서와 언론사에는 탄식과 분노의 전화가 이어졌고 소녀의 입양을 자원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등장하고 있다. 어디를 보아도 썩지 않은데가 없는 듯하고 그 누구를 보아도 부패와 탐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하게만 느껴지는 오늘,그래도 이런 사회적 반향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한가닥 위로이고 희망이다.
그러나 역시 그것만으론 안된다.
어느 개인의 악행을 비난하고 그를 엄하게 응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네살짜리 어린이를 데려다가 7년동안 동물처럼 사육하면서 돈벌이의 도구로 삼아온 인면수심에 모두가 놀라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따져들어가면 소설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 소름끼치는 잔혹성이나 소녀의 비극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얼마간씩은 있다.
소녀의 곡예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오히려 주흥을 돋으며 즐겨온 그 많은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소녀 스스로가 법에 호소할때 책임은 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던 그 당국자들은 누구며 그들은 또 누구의 당국인가.
서커스 소녀의 비극은 궁극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국가적 차원에서도 아동의 권리와 복지에 대해서는 둔담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 사회의 후진적 무책임성의 소산이지,어느 개인만의 악행의 소산이지는 않다.
○서커스 소녀의 비극
이 각박한 세태속에서도 시들지않고 우리들 본성속에 자리잡고 있는,그 분노할줄 아는 인간성은 그 자체로도 키워나갈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개화하고 열매맺기 위해서는 제도라는 이성적 장치의 매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어떠한 제도도 개인적 악행을 완벽하게 예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도적 장치만큼 그 악행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은 달리없다. 그러한 이상 우리는 그런 제도의 마련에 사회적 합의를 이룩하고 우리들의 능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우리들이 어느 개인의 악행에 분노하고 개탄하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겪어서는 안될 갖가지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에 더이상 무관심해선 안된다.
어린이의 행복은 그 사회적 행복지수이자,지표인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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