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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하이닉스가 미국에 있었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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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8년 IBM이 반도체 칩의 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미 버몬트주에 있는 자사 반도체 공장의 생산공정을 알루미늄에서 구리로 바꾼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인 MIT에서 구리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 처리 방법, 규제치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미국 환경청과 IBM은 MIT의 연구 결과와 과학적 자료를 근거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하이닉스' 공장 증설 문제로 온 나라가 싸움판이 된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공공기관을 분산해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겠다는 정책에는 수긍한다. 그러나 하이닉스의 이천 공장 증설 문제는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혹독한 현실을 고려해 재고돼야 한다. 하이닉스 문제가 지역 간, 정치 파벌 간 싸움이어서야 되겠는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세계와의 경쟁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를 짜내야 한다. 이제 현실을 알아보자.

미국 환경청은 IBM 반도체 공장을 통해 버링턴.프레츠버그 등의 상수원인 챔프레인 호수에 배출되는 구리에 대해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단 하수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슬러지에 대한 규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과 크게 다르다. 이뿐만 아니다. 미국 환경청은 유해 슬러지의 지정을 유보하고 IBM이 슬러지 재활용과 대기오염 감소에 치중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공정을 알루미늄에서 구리로 전환한다는 것은 30~40%의 전력 절감 및 세정에 사용되는 불소화학품의 사용 감소, 전력 소모를 25%까지 줄이는 칩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 친화적인' 방식으로 평가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환경단체가 반대성명을 내고 환경부까지 동조하는 듯한 인상이다.

구리는 식물과 동물의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로 빗물에 12ppb, 호수나 강에 50~100ppb, 매사추세츠주의 수돗물에 200~3200ppb가 함유돼 있다. 하이닉스의 경우 8ppb까지 정화해 처리하겠다고 한다. 이는 빗물에 함유된 구리 농도보다 낮으며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안전한 수치다. 참고로 미국의 수돗물 수질기준은 1300ppb이나 한국은 1000ppb로 더 엄격하다.

환경단체와 환경부에서는 최근 구리에 대한 문제를 살며시 접고 100여 가지의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반도체 공장을 팔당 상수원보호구역에 허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선진국의 경우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은 방류되지 않도록 하며 방류되더라도 미량이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는다. 환경단체가 그 사실을 알고도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면 국민을 기만하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하수를 처리해 상수로 이용하는 기술이 이미 실용화 단계에 있으며, 미국의 일부 물 부족 지역에서 이 방법을 적용할 정도로 기술도 발전됐다.

무조건 증설을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행 환경정책기본법에 따르면 팔당호 상수원보호특별대책지역에서는 구리 화합물을 포함한 19개 특정 수질 유해물질 배출시설은 배출량에 관계없이 들어설 수 없다. 즉 현행법에 의해서는 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 증설은 불가능하다. 법 개정은 그래서 필요하다. 하지만 최소한 구리의 인체 유해성을 이유로 상수원보호구역에 공장을 지을 수 없다는 논란만이라도 중단돼야 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시간은 돈이다. 결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해외 거주자들에게 한국은 애틋한 친정이다. 딱히 내놓을 만한 자원도 없으면서 공학자들에 대한 푸대접이 여전한 한국. 공학자의 말보다 정치가와 환경운동단체의 주장에 더 힘이 실리는 친정의 미래를 우려한다. 정치논리로 환경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해 시비를 가려야 한다.

박재광 미 위스콘신 매디슨대 건설환경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