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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규제 깨기'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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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의 지침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우수한 학생들을 뽑기 위해 짜낸 묘안입니다."

2008학년도 입시 요강을 발표한 고려대 입학처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그동안의 고충을 이렇게 털어놨다. 고려대의 신입생 선발 방식은 교육부의 지침과 비교하면 가히 실험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이다.

교육부는 2008학년도 대입에서 학생부 반영 비율을 높일 것을 대학 측에 요청해 왔다. 김진표 전 교육부총리는 대학 총장들을 모아놓고 이런 주문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수능을 등급제로 해 변별력을 떨어뜨리는 일을 병행했다. 대입에서 내신 비중을 높여 학교 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고대의 입시 요강은 교육부의 요청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내신은 무시하고 수능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가 하면 내신.수능을 다 무시하고 SAT나 영어실력만으로 선발하는 학생 수를 늘렸다. 등급화된 수능 성적을 가지고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영역과 등급별로 점수를 달리 줘서 학생의 우열을 가리기로 했다. 고교 간의 실력차를 반영하기 위해 과학고.외국어고와 같은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 학생들만 따로 경쟁시키는 전형도 만들었다.

정부의 규제를 모두 피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고려대 관계자는 "이번 선발 방식을 만들기 위해 기존 학생들의 학생부.수능.논술 성적을 수없이 분석해 봤다"고 말했다. 대학이 학생 선발을 알아서 하도록 놔뒀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다른 대학들은 고려대의 이런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 사립대 관계자는 "오죽하면 고려대가 그런 방법을 생각했겠느냐"며 "대학들을 고생시키는 교육부의 규제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대학은 3월 중에 입시 요강을 공개한다. 각 대학들은 나름대로 우수 학생을 뽑는 묘책들을 짜낼 것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는 아예 학생부 등급이 일정 수준만 넘으면 내신을 모두 만점을 주기로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 대학 역시 교육부의 내신 반영 비율을 높이라는 지침을 다른 방식으로 피하려는 것이다.

규제를 받는 측은 항상 빠져나갈 길을 찾는다. 규제가 터무니없는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교육 당국은 효과 없는 규제를 하기보다 학생 선발권을 대학에 돌려주는 것을 생각해 볼 때다.

박수련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