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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농군 20년" 학사부부|쇠점터 농장 정재건·계영자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서울대를 졸업한 젊은 부부가 지리산 깊은 곳에 들어가 밤나무를 키우고, 염소를 키우고 밭을 일구면서 20년째 살고 있다.
지리산 쌍계사에서 6km 더 올라간 해발 2백깐m 산중, 화개천 계곡을 끼고 있는 6천여평의 언덕에 쇠점터 관광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정재건(47)·계영자(45)씨 부부.
정씨 부부는 지난 72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곳 쇠점터에 들어와 흙벽돌로 집을 짓고 누에를 치고 밤을 따면서 살림터를 개척해 지금은 어엿한 농장을 갖게됐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뒤 대학원을 다니며 인구사회연구소 조교로 재직하고 있던 정씨와 경기여고·서울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한 계씨 부부는 장학금이 보장된 유학이라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지리산의 농사라는 비포장 길로 들어선 것이다.
정씨는 어느 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통계관계 일을 하는데 회의를 느꼈고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해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가져온 오랜 의문이 갑자기 구체적 모습으로 다가왔다고 고백한다.
학교에서 빠져 나와 낯선 거리를 헤매다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향할 때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며 느꼈던 삶에 대한 따스한 기억들, 그 삶을 알고 싶었던 그에게 서울도, 미국도 맞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10월 유신을 전후한 어수선한 사회상황도 자신의 은둔 결심에 한 몫을 했다고 토로한다.
70년에 결혼, 단칸방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딸 등 세 식구의 신혼살림을 하고 있던 그는 72년 2월 혼자서 퇴거신고를 하고 지리산 쇠점터의 숲 속 계곡가로 내려가 버린다.
아내에게는 『정말 우리가 살만한 곳이 있다』며 즉석 여행이라도 가는 듯이 함께 내려가 보자고 하고서는 『여기서 살겠다』며 늘러 앉은 것.
처음엔 남편의 이런 처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인 계씨도 결국 저 사람과 같이 살려면 그의 소신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입산을 택했다.
주위의 반대는 심했다.
전형적 도시 엘리트 출신 부부가 갑자기 입산해서 농사꾼이 되겠다니 부모가 찬성할 리 없었다.
사업하던 정씨의 부친은 아들 부부가 사는 곳을 돌아보고는 『왜 하필 이런 한심한 곳에 와서 살겠다는 거냐』고 눈물지었다.
정씨의 장인은 대법원 판사를 지낸 변호사 계창업씨.
처가에서도 자기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면 손들고 나오겠지 하며 3년간 10원 한장 도와주지 않았다.
부인 계씨는 백일이 갓 지난 딸을 데리고 지리산·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한지 6년 뒤 첫딸 영리가 일곱 살이 되고 둘째딸 마리가 다섯 살 되던 해 쇠점터에 마음을 붙이고 정착한다.
사흘이 지나도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는 오지에서 영농교본을 보면서 감자·상추·쑥갓·들깨·고추·가지 등을 재배하고 염소를 키우고 돼지를 치고 닭·오리 등을 길렀다.
전기가 없어 촛불을 여섯 개나 켜놓고 저녁식사를 할 때면『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부자』라며 함께 웃는 생활은 몸이 고달파도 마음은 윤택했다.
정씨가 이 산 속에서 외도한 적이 한번 있다.
대학에 교수자리를 내주겠다는 선배의 강권으로 84년 진주 경상대에서 1년간 철학·사회학개론 시간강사를 했던 것.
그사이 농장이 피폐해지고 벌통이 전멸하는 것을 보고 그 선배도 손을 들었다.
산 속에서 문제가 된 것은 두 딸의 교육.
큰딸은 산아래 왕성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중학교를 보내려니 너무 먼 곳에 있었다.
큰딸 영리(17)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의 지도로 1년간 집에서 공부한 뒤 고입검정고시를 거쳐 이듬해 진주 삼현여고로 진학한다.
영리는 고교를 졸업한 뒤 재수 끝에 올해 서울대 법대를 지망했다가 제2지망인 불문과에 합격했다.
둘째 딸 마리(15)는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해 우리 전통 공중음악인 정가를 배우고 있다.
그사이 정씨 부부는 봄엔 녹차를 만들고, 여름엔 민박을 치고, 가을엔 밤을 따고 염소를 키우는 생활을 계속했다.
양봉은 12년 전부터 정씨가 시작했다..
봄에는 지리산의 꽃을,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강원도의 꽃을 찾아 2백개의 벌통을 보살펴 생산하는 그의 꿀은 「꿀은 양봉가의 인격」이라는 모토대로 인기가 높다.
외부인과 거의 두절하고 살다가 이곳 6천여평의 대지에 쇠점터 관광농장이란 팻말을 세운 것은 5년 전의 일이다.
개인이 갖고 있는 터를 잘 가꾸고 지켜 몸과 마음이 고단한 이들에게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자는 뜻이다.
지금 농장 일은 부인이 전담하고 정씨는 양봉과 자녀교육만 맡는 분업체계를 이룩하고 있다.
부인 계씨는 『시골 일이 어떤 것인지 몰라 덤벼들었지 이렇게 힘든 것인 줄 미리 알았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 면서도 『지금은 남편의 뜻을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부부가 함께 1시간동안 녹차를 마시며 하루 일과를 계획하는 시간, 산 안개는 희부옇게 피어오르고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속에서 계곡 물은 도란도란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화가 들어온 것은 3년 전이고 아직 TV하나 없이 라디오를 통해 일기예보를 듣는 것이 고작인 이곳 생활을 자식들에게도 권하겠느냐고 물으면 정씨 부부는 『자신들이 선택할 일』이라며 『찬성도 반대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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