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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7. 최명재식 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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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는 생각했다. 상대는 시장에 새로 뛰어든 후발 업체를 단순히 견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리려 하고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나는 '죽으면서 사는' 길을 택했다.

어디서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나는 문득 신문광고를 생각했다. 신문 광고란이 상품 광고 이외의 용도로 가치를 발휘한 것이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대한 광고 통제사건이었다. 당시 정부는 두 신문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자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이들 신문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다.

두 신문은 광고란을 백지로 비워둔 채 신문을 발행했다. 광고 없는 광고란은 수천마디의 연설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을 떠올렸다. 신문의 광고란을 이용해 '파스퇴르 죽이기'에 나선 거대한 세력과 싸우자. 소비자인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죽은 우유와 산 우유의 차이를 알리고, 그들의 이해와 동조를 바탕으로 눈앞의 절벽을 넘자. 여기서 내가 물러나면 우리나라 우유산업은 수십년 동안 무덤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태어난 것이 이른바 '최명재식 광고'였다. 소비자에게 우유의 진실을 알리려면 적어도 5단짜리 광고를 10회 이상 내야 할 것 같았다. 이 같은 시리즈 광고를 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 신문 저 신문 옮겨다니는 것보다 한 신문을 선택해 며칠에 한번씩 광고를 싣기로 했다. 만약 광고가 나가는 도중에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거나 반론이 들어올 경우에는 그때 그때 역시 광고로 대응하기로 했다.

예상 반론에 대한 답변 자료도 준비했다. 이론 분야는 주로 후지에 박사가 덴마크와 일본에서 갖고 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국내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충해 정리했다. 무엇보다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된 밑거름은 81년 '진짜우유'를 알게 된 뒤부터 목장을 개선하고 공장을 설립해 우유를 생산하기까지의 경험이었다.

나는 먼저 88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같은 달 15일자부터 9월 15일자까지 6개월 동안 보름 간격으로 모두 13회에 걸쳐 실을 광고의 목차를 발표했다. 첫회 제목은 '이 땅에 좋은 우유가 뿌리내리고 우리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득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경위'였고, 마지막회는 '유제품에 대한 우리 회사의 제언'이었다.

예고한 대로 3월 15일자 조선일보에는 5단짜리 광고란을 글자로 빽빽이 채운 첫회분이 실렸다. 글은 내가 직접 썼다. 광고 내용은 '우유 음용자 여러분께'라는 제목의 전단을 배포하고, 나의 질문에 "소에서 나온 젖은 모두 같다"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해준 정부기관에 대한 공격이었다.

신문광고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소리 없이 파스퇴르를 말살시키려던 세력의 기도는 물거품이 됐다. 앞으로는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반(反)파스퇴르 세력의 일차적인 대응은 역시 정부기관을 업고 합법적으로 파스퇴르를 죽이는 것이었다. Y협회가 앞장섰다.

이 단체는 88년 1월 파스퇴르제품 홍보 전단의 내용을 문제삼아 우리 회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이미 진행 중이던 전쟁은 나의 신문광고로 인해 갑자기 전면전으로 확산됐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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