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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낳자마자 탁아소로/당시 유모 이재덕씨 하바로프스크생활 회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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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산속의 황량한 야영천막서 태어나/몸약한 김정숙 젖 모자라 대신 젖줘
김정일 후계체제가 공고화되기 시작한 80년대부터 북한의 김정일 관련문헌들은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당국도 김이 태어났다고 하는 백두산 밀영의 귀틀집을 성역화하고 있다. 이는 후계자 김정일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주체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선전차원에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소련의 하바로프스크 88독립여단에서 김일성의 첫 부인 김정숙의 동료전사이자 김정일의 유모였던 이재덕씨(74)는 김정일이 하바로프스크태생임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북한의 요청으로 이씨가 지난해 가을 쓴 『야영생활의 회고록』을 입수,요약 소개한다.
김정숙동지의 첫 인상은 몸이 약하다는 느낌이었다.(김정숙의 이름은 김정숙이라고도 쓴다). 단발머리에 둥그스름하고 순한 얼굴이면서 몸도 가늘고 작았다.
41년 11월 겨울,우리의 부대가 소련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브야츠크야영에 도착했을때 거기에 있던 여성전사들이 나에게 모였다.
김정숙동지가 나에게 『전우가 늘었네요』라고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다정하게 한마디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김정숙동지는 나보다 두살 밑이었지만 곧 친자매처럼 친해졌다. 당시 나는 23세였고 한족 남편 우보합(당시 소대장)과 결혼한 몸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된 것은 만주 항일빨찌산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항일연군 전체가 소련으로 이동한 때문이었다.
내가 도착한 북야영(야츠크야영)은 하바로프스크 동북 75㎞ 아무르 강변에 위치했는데 우리끼리는 브야츠크 야영이라 불렀다. 그곳은 산속이었고 원시림이 들어찬 곳이었다.
도착당시 그곳은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야영은 군관속소인 통나무집 몇채가 있을 뿐 모두 천막생활을 하고 있어 황량해 보였다.
천막은 남자숙소·여자숙소로 구별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탁아소에 맡겼다.
김정숙동지의 남편 김일성은 군관(장교)이었지만 천막생활을 해 정일이가 출생한 뒤에도 얼마동안 김일성은 남자숙소,정일이는 탁아소,김정숙은 여자숙소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1942년 봄 야영을 확대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의 손으로 나무를 베고 땅을 고르고 해 탁아소·병원·숙소 등을 만들면서 군관들은 별도의 집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교통연대 무선전 통신대에 배치받았다. 그곳에는 모두 40명 가량의 여성전사가 있었는데 조선여성은 나를 포함,9명이었다.
그들은 정치부여단장 이조린의 부인 김백문,지금 흑룡강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인 이민(당시이름 이명순),최용건의 부인 왕옥환(왕은 한족이었지만 우리는 조선족으로 취급했다),장경옥·박경옥·김옥순(최광애인)·이영수·김정숙,그리고 나까지 9명이었다.
대장은 최용건의 부인 왕옥환이 맡았다. 김정숙동지의 계급은 전사였다.
가자마자 동계훈련이 시작됐다. 새벽 6시에 기상해 30분 체조하고 매일 8시간동안 정치학습·군사훈련을 했다. 여성전사라고 해 예외가 없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체조·육박전·실탄사격·스키훈련 등을 해야했다.
우리는 무전기를 메고 추운 겨울에도 땀이 흐를 정도로 산을 뛰어다녔다.
시간나는대로 땔나무를 구해야했고 여자들은 주방에서 일을 해야했다.
임신한 김정숙동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42년초 잠시 만주전선으로 재투입돼 정찰활동을 했다. 이 야영의 여단장인 주보중장군의 지시로 야영에 돌아온 42년 4월 정일이가 태어나 있었다. 딱딱한 야영생활에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 모두 귀여워했다. 당시까지 아이라고는 최용건의 자식 뿐이었다.
정일이는 유라라는 소련이름으로 불렸다. 유라는 2차대전때 18세의 어린 처녀 몸으로 적의 후방으로 파견되어 지하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된 소련의 여성영웅 조아의 남동생 이름이다.
정일이는 낳자마자 탁아소로 갔다. 아이를 낳아도 일과때문에 보살필 수 없어 탁아소에 맡기는 것이 그곳의 규칙이었다.
정숙동무는 출산뒤 한달만에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곳 규칙은 출산후 한달만 쉬도록 되어 있었다.
나도 7월에 딸을 출산했다.
아이 이름은 중국어로 우화,소련어로 니나였다. 나도 아이를 탁아소에 맡겼다. 그런데 젖을 주러 가보니 몸이 약한 정숙동지가 제대로 젖이 나오지 않아 정일이가 마구 울고 있었다. 불쌍해 내가 젖을 주기 시작했다. 정일이는 잘 받아먹었고 금방 살이 올랐다.
정일이는 곱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살이 통통하고 남자답게 생겼었다. 정일이나 우리 딸이나 금방 살이 올라 뚱뚱해졌는데 둘다 걸음을 빨리 못걷고 뒤뚱뒤뚱하고 걷던 기억과 정일이가 우리 딸을 깨물어 울리곤 하던 기억들이 난다.
김일성은 군관이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는데 건강하고 보기좋은 모습이었다.
김일성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가 하바로프스크 남영을 거쳐 북영으로 왔다고 들었다.
군관들에게 집이 배정된 뒤 김정숙동지의 집에 놀러가곤 했다. 김일성의 집에는 탁자하나,책장이 하나 놓여있었을 뿐 단출했다.
김정숙동지는 무선훈련이나 다른 훈련에서 특별히 잘하거나 못하지도 않은 보통이었다. 전선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사실 무전조작이 실전에서 사용할 정도가 못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지가 굳고 대대장 부인이면서도 티를 내지않고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돋보였었다.
42년 부대확장이 결정되고 우리는 밤낮없이 일했다. 전사 모두가 이 일에 매달렸다. 일을 하며 훈련을 했다. 벌목·채석을 하고 강가에서 물을 긷고 불을 놓아 땅을 갈아야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밭을 갈아 옥수수·토마토·호박 등을 길러야했었다.
그런 식으로 45년까지 살았다. 45년 8월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남편을 따라 중국해방전선에 다시 투입됐고 정숙동지와 정일이는 북조선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48년 북조선 건국에 초대됐을때 다시 만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다. 김수상도 우리를 접대해주었다. 그때 다시 정일이를 만났다. 어릴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일이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를 못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이었다. 50년이 되어 정숙동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 이후 북조선을 다시 찾을 기회는 없었지만 김일성수상은 63년 항일연군 3로군 3군의 정치위원이었던 풍중운동지가 북조선을 방문했을때 잊지 않고 선물을 전해 주었다.
김수상은 우리 일곱식구 모두에게 옷 한벌씩과 스카프를 선물했다. 그중 미황색의 여자 털스웨터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새 옷처럼 보관하고 있다. 그때 김수상이 보내준 그의 다섯식구 사진과 천리마건설사진도 아직 우리집 앨범에 간직되어 있다.<북경=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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