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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진단] 불안감이 투자·소비 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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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국내 굴지의 제지회사인 A사는 내년 초부터 4천억원을 들여 충청 지역에 신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중국의 종이 수요가 급증해 제지의 수출 비중이 커지자 내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 공장 건설을 보류했다. 내수 경기가 좀처럼 살아날 기미가 없는 데다 정치.금융 불안 등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 이 회사 K사장은 "수천억원이 들어가는 큰 공장을 지을 때엔 경기상황은 물론 금융시장 변화와 정치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우리 회사에 지분 투자한 외국인들의 시각도 우리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수출 호조에 힘입어 부분적인 경제 회복 기미가 나타나면서 기업들이 생산설비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정국혼란.노사대립.국론 분열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단정하긴 어렵지만 경제외적인 요인이 기업가들을 망설이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경부에 따르면 2분기에 마이너스(-0.2)를 기록했던 '설비투자 조정압력'이 3분기엔 플러스(0.4)로 돌아섰다. 이는 생산증가율에서 생산능력증가율을 뺀 것으로 이 수치가 플러스면 설비투자를 늘리는 압력이 커진다는 의미다.

10월에는 산업생산증가가 무려 7.4%에 달했지만 생산능력은 2.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제조업 평균가동률도 80%가 넘어 6년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반대의 투자패턴을 보였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올 3분기 설비투자는 지난해보다 오히려 4.7%가 줄어들었다. 10월 설비투자(통계청 추계)도 3.8%가 줄었다. 생산을 늘릴 필요를 느끼면서도 막상 투자는 꺼리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11월 20~28일 국내 5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업환경 및 경영애로 설문조사'(응답은 49개사)도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조사에서 대기업들은 아직 설비 투자를 늘릴 생각이 없으며, 일러야 내년 3분기 이후 투자가 회복될 것이라고 답했다.

소비 위축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기업들은 내다봤다. 내년 상반기 중 소비가 살아날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들은 7개사(15%)에 불과한 반면 절대 다수인 41개사(85%)가 하반기 이후부터 소비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기업들은 내년 경영기조도 '내실 위주'로 가져갈 계획( 41개사)이라고 응답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1천3백7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해 30일 발표한 '기업경기전망(BSI) 조사'결과도 유사하다.

이에 따르면 내년 1분기 BSI는 89로 기준치(100)를 크게 밑돌고 있다. 특히 수출(99)은 전분기와 비슷할 것으로 전망된 반면 내수(88)는 계속 위축될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은 "단기적인 경기부양과 금융.세제 지원 등 유인책으로는 투자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정책의 불안 해소와 노사관계.금융시장 안정, 기업 수사 조기 종결 등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 해소가 더욱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별취재팀
사진=송봉근 기자<bksong@joongang.co.kr>

<사진설명전문>
수출 호조로 부산항이 밤을 잊었다. 경상수지 흑자가 11월 말 기준으로 1백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30일 부산 감만항 컨테이너 부두에서 수출 화물이 선적되고 있다.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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