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한국이 변할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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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샌드위치 코리아'는 새로운 현상도, 느닷없이 부각된 위기론도 아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한 미국계 컨설팅 회사의 '한국 보고서'는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넛 크래커(호두 깨는 기계)' 신세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이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뒤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생명력은 놀라웠다. 삼성.현대자동차 등이 글로벌 일류 브랜드로 성장했고 메모리 반도체와 조선은 확실히 일본을 제쳤다. 한국산 메모리반도체가 없으면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이 멈춰야 할 판이다. 우리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숱한 '승리의 추억'을 남겼다.

이 때문이었을까. 본지에 '샌드위치 코리아'기획 시리즈(20~22일자)가 세 차례 나간 뒤 독자들의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견이나 비판도 많이 쏟아졌다. 상당수는 한국의 미래를 걱정했고, 또 많은 독자는 "위기를 너무 부풀렸다"고 지적했다. 한 독자는 "중국 기업들이 이 기사를 '한국 상품'이 별 것 없다고 음해하는 데 악용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매국적 기사'라는 e-메일을 보내왔다.

이런 반응을 보며 오히려 안심이 됐다. 우리 국민의 기가 꼿꼿하게 살아 있음이 느껴졌다. 한국인은 우리가 처한 위기가 어떤 것인지만 알면, 반드시 이를 타개하는 힘이 있다. '샌드위치 코리아' 기획은 바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위기의 실체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6년 전 '중국 경제 대장정' 기획을 위해 중국 취재를 한 뒤 이번에 다시 가 본 중국은 확 달라져 있었다. 80년대 한국과 같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불황 터널에서 빠져나온 일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은 연일 한국 기업을 겨냥한 발언을 쏟아놓는다. 이들은 이미 전열을 정비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2일 임원 세미나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어떻게 생존할지 임원들이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 것도 기업들의 체감 위기를 반영한다.

중국과 일본은 크게 변했다. 이젠 한국이 변할 차례다. 기업들은 해묵은 '승리의 추억'을 떨치고 재무장해야 한다. "국면이 변하면 응전의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토인비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을 때다.

양선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