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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진압인가 정당방위인가/논란부른 대학원생 희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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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시위학생 적어 극한 상황 아니다/학생/화염병공격 방어 위협사격 일뿐/경찰
서울대대학원생 한국원씨(27)사망사건은 경찰의 시위대에 대한 과잉진압·정당방위여부,총기사용허용의 한계·방법 등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의 총기발사로 발생한 이번 사건에 대해 학생·재야운동권·야당이 대정부공세를 위한 새쟁점으로 부각시키고 있어 올 하반기 시국 방향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파출소를 지키던 경찰관들의 실탄발사가 불가피한 일이었느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시위대의 기습적인 화염병공격으로 위협이 가해진 상태에서 총기발사는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경찰은 사고당일인 17일 오후 10시20분쯤 서울대생 2백여명이 신림 2동 파출소를 습격,화염병 1백여개를 던졌고 이어 파출소장 조동부 경위(38)가 발사한 6발의 실탄중 1발의 유탄에 맞아 한씨가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날 경찰관의 발포는 소요사태진압상황에서의 정당방위였다는 것이 경찰측 주장의 핵심.
그러나 당시 현장상황을 목격한 김미호씨(22·서울대경영4)등 목격자에 따르면 실제 파출소를 습격한 대학생의 수는 40∼50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습격직후 신림네거리·서울대정문방향과 한씨가 숨진 파출소 건너편 1백여m지점인 가나다제과앞 등 세갈래방향으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어 곧바로 2명의 시위학생들이 다시 파출소앞 좌·우대각선방향에서 화염병을 던진뒤 조경위등 2명이 파출소밖 왼쪽 담쪽으로 나와 실탄사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경찰이 발표한 시위대 숫자는 과장됐고 실탄발사시점도 극한적 위해상황은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발포를 정당방위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의문도 제기된다.
한편 조경위 등의 실탄발사때 안전수칙이 지켜졌는지 여부도 또다른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경위는 사고직후 경찰자체조사에서 『38구경권총의 총신을 45도 이상으로 치켜올려 발사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18년간 FBI사격교관을 지냈던 (주)현대알루미늄공업대표 이진호씨(49)는 『38구경권총사격때 45도 이상으로 상향사격을 하지 않으면 실탄이 1백m이상의 거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해 조경위가 45도 이상 상향사격의 안전수칙을 지켰다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38구경권총의 최대 사거리가 9백m,유효사거리가 50m인 점을 지적,45도이상 상향사격을 했는데도 불과 1백여m 떨어진 지점에 있던 한씨가 총에 맞았다는 주장의 설득력을 의심하고 있다.
또 한씨가 숨진 가나다제과방면으로 10여명의 시위대가 도주하고 있었고 당시 다수의 시민들이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필적 고의부분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번 사건은 현재 진행중인 국정감사 및 야권통합과 맞물려 하반기정국 및 2학기 대학가의 최대이슈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최근 소련쿠데타실패 및 남북유엔동시가입 등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표류해온 학생·재야운동권에 극적인 소생의 기회를 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원식 국무총리 폭행사건으로 일반시민과 학생들로부터 고립돼 침체국면을 걸어왔던 학생운동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5월 강경대군 사건직후처럼 가두시위 등을 통해 대대적인 대정부공세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또 전민련등 재야단체도 6월 명동사태이후 그동안 수면하에서 논의돼 왔던 상설연합단체결성작업을 이 사건을 계기로 대정부투쟁과 자연스럽게 접목시켜가면서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오영환·고대훈기자>
◎숨진 한씨 주변/학업 전념했던 농촌출신 수재/과외로 생계꾸린 신혼 9개월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서울대대학원생 한국원씨(27)는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도 교수의 꿈을 안고 부인과 함께 과외교습 등으로 단란한 신혼생활을 해왔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가 고향인 한씨는 탁주양조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한주희씨(55)와 어머니 고영옥씨(52)의 3남2녀중 넷째로 83년 순천고를 졸업하고 서울대공업화학과에 입학했으며 87년 같은 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과수석을 놓치지 않는등 내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던 한씨는 유전공학도가 되겠다는 목표아래 학문에 뜻을 두고 89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과묵한 성격의 한씨는 대학재학시절 서클에도 가입하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해온 전형적인 학구파로 박사과정을 마친후에는 소련에 유학할 예정이었다.
학교 후배인 안상선씨(24·석사과정)는 『한씨가 후배에게 잘해주고 선배에게 깍듯했었다』며 『대장균에서 아미노산대량생산기술을 밝힌 석사논문은 당시 지도교수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역작으로 평가받았었다』고 말했다.
이대영어교육과를 졸업한 부인 서윤경씨(24)는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란 후배로 이들은 오랜 연애끝에 지난해 12월23일 결혼했다.
이들은 결혼후 학교와 가까운 서울 신림 9동에 보증금 9백만원·월6만원짜리 단칸 셋방에 보금자리를 마련,남편 한씨의 조교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렵자 자리가 잡힌후 아이를 갖기로 약속하고 고교생들을 상대로 부부가 함께 과외교습을 해왔다.
한씨는 숨진 17일밤에도 아내와 함께 과외교습을 할 학생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홍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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