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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5) 경성야화(40) 경성방송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927년 2월에 경성방송국이 생겨서 전국적인 방송이 개시되었다. 그때까지는 방송이라는 말자체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외국에는 방송국이 있어서 수신기만 있으면 누구든지 노래나 뉴스를 청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정도였다.
동경에 먼저 방송국이 설치되어서 호출번호가 JOAK,로 되었고 그 다음에 대판에 생겨서 호출번호가 JOBK 세번째로 명고옥에 설립된 방송국의 호출부호가 JOCK였다. 경성방송국은 네번째로 생긴 것이어서 JODK가 호출번호였다.
당시 총독부는 정동 언덕위에 새로 집을 지어 안테나를 하늘높이 세워놓고 시험방송을 했다. 용어는 물론 일본말이고 조선어방송은 어린이노래·동화·조선민요·야담등을 들러리로 끼워놓았다. 어쨌든 벽에 걸어놓은 나무상자속에서 사람의 목소리와 노래가 흘러나오니 신기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는 어릴적에 길에 박아놓은 작은 쇠통 속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요술을 보듯이 신기하게 바라보던 일과 주먹만한 유리공 속에서 불이켜지는 것을 보고 놀라던 것을 생각하였다.
경성방송국의 기술책임자는 노창성이라는 조선사람이었다. 1933년에는 이중 방송으로 확대되어서 조선어방송이 일본말 방송과 분리돼 제2방송이란 이름으로 독립됐다.
조선어방송이 제2방송으로 독립되기 전인 l928년ll월에 경성방송국에서 「이왕직아악의 밤」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아악을 일본 전국에 중계방송하였다. 일본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우리나라의 궁중아악이었다. 그 장중하고도 신비로운 선율은 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일본의 신문·잡지에 놀라움을 표하는 글이 실렸던 것이 기억난다.
같은해 1928년 새해 벽두에 ML당이라는 제3차 공산당사건이 터져 내외의 이목을 놀라게하였다. ML이란 것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름 첫자였다. 놀라운 것은 그 ML당의 책임비서, 즉 최고책임자가 다름 아닌 동아일보편직국장인 김준연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김준연은 동경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한뒤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신흥러시아의 이모저모를 탐방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우리나라 최고지식인이었다. 그는 러시아에 다녀온후 다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편집책임자인 편집국장의 자리에 있었다.
제1차 공산당은 박헌영·김고수등을 최고간부로 하여 활약하다가 l925년 ll월에 검거되었고, 제2차 공산당은 이준태등 l5명이 1926년 6월에 검거되었다. 이번에 검거된 제3차 공산당은 제2차 공산당에 이어서 그해 l2월에 김준연을 중심으로 안광천·한위건등이 조직한 것이었다.
ML당은 관련자가 우리나라의 최고지식인을 망라한 50여명에 달하는 중대한 사건이어서 신문도 호외를 발행하고 민심이 그게 격앙됐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충격은 매우 커서 경성제국대학안에 「성대반제동맹(성대반제동맹)」이란 비밀결사가 조직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 4, 5년이래로 좌익운동은 매우 활발해 공산당이 검거되면 즉시 다음공산당이 조직되고 다음 또 다음으로 꼬리를 물고 후계공산당이 조직되는 형편이었다. 이번에 제3차 공산당인 ML당이 검거된뒤에도 즉시 제4차 공산당이 조직되었고 이들은 8월에 검거되었다.
문화면에서 이 해에 주목할 사건은 홍벽초가 조선일보에 장편 「임거정전(임거정전)」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벽초는 춘원·육당과 함께 우리나라의 삼대 천재로 일컬어져온 사람이다. 위의 두사람이 많은 작품을 발표해왔음에 비하여 벽초만은 별로 작품다운작품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상을 가다듬어 의적으로 유명한 임꺽정의 행적을 소설화하기로 하고 드디어 처녀작의 붓을 든 것이었다.
이때문에 일반독자들은 비상한 관심으로 이 소설에 기대를 걸어서 이광수·최남선에 비교될 어떤 솜씨를 보여줄 것인지 처음부터 큰 흥미를 가지고 새 소설을 애독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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