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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한국 바둑' 심는 남과 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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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봉수 9단이 호찌민시에서 열린 제1회 서봉수배 바둑대회에서 입상한 어린이들에게 시상하고 있다.

서봉수 9단과 지난 2일 베트남에 갔다. 호찌민시에서 제1회 서봉수배 바둑대회가 열려 몇몇 일행과 함께 그곳을 찾은 것이다. 사교도 서툴고 세상사에도 어두운 '토종'서봉수가 베트남이란 바둑의 불모지에서 바둑 보급에 나선다는 게 마냥 신기했다. 서 9단은 몇년 전 베트남 신부인 람티무아하씨와 결혼했다. 그것이 인연이 된 것일까. 이번 여행엔 람티무아하씨도 동행했다. 2년여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에 가는 것이다.

바둑 대회는 3일 호찌민시의 청소년 회관에서 열렸다. 태광비나실업(태광실업의 베트남 법인)이 후원했고 공식적인 주최는 베트남 교민 기우회.

오전 9시. 운동장에선 베트남 소년 소녀들이 태권도와 축구를 하고 있었고 그 안쪽 야외 홀에선 64명의 베트남 참가자와 번외 경기를 치를 20명의 한국교민들이 바둑판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사방엔 서봉수란 인물을 알리는 사진과 포스터, 그리고 플래카드가 걸려 그럴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교민 기우회의 오희문 회장과 전정로씨 등이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서 9단은 흰색 정장에 꽃을 단 채 "이번 대회가 베트남 바둑 보급의 시금석이 되면 좋겠다"는 축사도 했다. 현지 TV와 신문에서도 베트남의 첫 바둑시합이라 할 이 신기한 광경을 취재했다. 베트남엔 체스가 꽤 널리 보급된 반면 바둑 팬은 이제 막 입문한 사람까지 다 합쳐도 불과 3000~4000명 정도. 한창 바둑붐이 불어 바둑인구가 200만을 넘어선 인근 태국이나 오래전에 바둑이 보급된 싱가포르 등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강인한 기질을 볼 때 동남아 일대에서 최고수가 나온다면 바로 베트남일 것이란 평가도 있었다.

참가 선수들은 대개 어렸다. 남녀를 나누고 17세를 기준으로 다시 나눠 4개 조로 대회를 치렀다. 17세 이상 최강부 우승자는 500달러의 상금을 받고 한없이 기뻐했다.

대회가 끝난 이틀 후 서 9단은 부인의 뒤를 쫓아 호찌민시에서 동쪽으로 290㎞ 떨어진 한당으로 향했다. 유명한 휴양지 판 티엣 인근의 어촌이었다. 서 9단은 이런 얘기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무척 꺼려 기자와의 동행은 완곡히 거절하면서도(우리는 여기서 헤어졌다) 람티무아하씨가 '효녀'라는 것만은 말하고 싶어했다. 서울에 온 람티무아하씨의 소원은 고향의 아버지에게 배를 한 척 사주는 것. 처음엔 배 한 척이라 해서 놀랐으나 가격을 알고보니 700만~800만원에 불과(?)했다. 그 소원을 들어주고자 이번에 서 9단은 1만 달러를 준비해왔다.

젊은 남녀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엄청난 활기를 토해내는 호찌민 시를 보며 이곳이 중국처럼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역동적인 베트남 한쪽에서 치러진 신기한 바둑대회, 그리고 먼 시골의 어촌으로 달려간 서봉수 9단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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