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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CoverStory] 그 시절 새색시 때 쓰던 재봉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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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이불 만들어 줄 목화솜을 매만지고 있는 김명호씨 부부.

김명호씨 부부는 칠십 평생 한번도 세상의 주목을 받은 적 없는, 참으로 평범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하기야 우리네 부모, 조부모들이 대부분 그렇지 아니한가. 해서 더 애틋한 이들의 삶은 집 구석구석 놓인 물건들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김씨는 우리 나이로 스물한 살 때, 열아홉 먹은 이웃마을 처녀 강신성씨를 맞아 부부가 됐다. 없는 살림에도 양가에선 정성껏 혼수를 준비했다. "난 장가들 때 무명 두루매기(사진(1))랑 명지(명주) 바지를 해입었어유. 그게 여적지 있는디, 그 옷을 죽을 때 입고 들어가믄 저승가는 길이 밝댜." 그런데 젊은 신랑이 야속도 해라, 혼례 올린 지 넉 달 만에 덜컥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순해 터진 색시는 엄한 시어머니의 매운 시집살이를 오롯이 혼자 견뎌야 했다.

사진 1

색시는 시집 오기 전 8년 동안 대전 공장에서 재봉 일을 했다. "우리 아부지가 너는 못 가르쳐도 네 오빠는 가르쳐야 된다구, 나이 지난 오빠를 내 이름으로 대신 학교에 보냈어유. 그 때 얼매나 울었다구. 말두 못허게 울었어유." 시집 온 2년 뒤, 며느리 솜씨 좋은 줄 아는 시어머니가 쌀 두 가마니를 팔아 재봉틀(사진(2))을 사줬다. 색시는 남편 없는 긴긴 밤을 재봉틀을 돌리며 새우곤 했다.

34개월 뒤 남편이 제대했지만 시름은 가시지 않았다.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애기 못 낳으면 그냥 우두머니유. 시어머님은 밥값 못한다 타박하시구. 아랫집 누가 애 낳았다 하면 몸띵이가 오그라들어. 무슨 희망이 있겄어유." 그렇게 6년, 드디어 첫 애가 들어섰다. 큰 딸 영자(46)씨였다. 이어 둘째딸 영옥, 큰아들 철영(42), 작은아들 철민(38)씨가 맞춤한 터울로 태어났다.

김씨는 부엌 한 구석에 세워둔 스테인리스 쟁반(사진(3))을 보면 지금도 옛 생각이 난다고 했다. "역사가 깊은 것이여. 큰아들이 국민핵교 3학년 때 놀다 허벅지를 분질렀어요. 치료가 잘못돼 굽은 뼈를 다시 부러뜨려 깁스를 했는데 입원 기간이 두 달이여. 어머님과 나는 간호를 하구 안사람은 한푼이라도 벌겄다고 반찬장사를 했어요. 그때 마련한 게 저 스댕 오봉이유." 아내는 집에서 한 밥을 그 '오봉'으로 대전 병원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날랐다. 장사에, 농사일에, 집안 살림, 밥 수발까지. 당시 아내의 고생을 김씨는 차마 잊지 못하는 게다.

사진 2

맘 씀씀이가 천생 맏딸인 영자씨는 산업체 부설학교에서 일하며 공부했다. 공무원 윤용수씨를 만나 결혼한 때가 스물다섯 살. 김씨 부부는 큰사위를 "세상 없이 착하고 착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부부는 명절 때면 동동주를 두 말, 세 말씩 담근다(사진(4)). "우리 큰사위가 잘 자시거든. 게다가 남 주는 걸 좋아해서, 군청에 있을 때는 누가 동동주 먹구 싶다 하면 만날 갖다 날랐어요. 요즘도 내가 자꾸 물어봐요. '술 쓸디 있어 없어?'"

똑똑하고 야무진 둘째딸(사진(5))은 부부에게 자랑이자 근심이었다. "얘가 고등학교 졸업하구 자꾸 대학 간다구 해유. 아이구, 그땐 힘들어서 '아버지 봐둔 데로 가서 일하자' 했더니 죽어두 싫대유. 이제 등록금 낼 때가 됐는디, 그날 11시 넘어가면 안된댜. 그 시간에 돈이 안 들어가면, 아이구, 아이 베리겄어유. 할 수 없이 지 아버지가 대평리 가서 급전 빌려 겨우 막았지유." 강씨의 말이다.

사진 3

졸업 뒤 영옥씨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김씨 부부는 늦기 전에 시집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안달이 났지만 영옥씨는 요지부동이었다. "내가 걔 땜에 속 엄칭 썩었어유. 서른여섯을 먹었으니 세상 다 보낸 거 아녀유. 그 때서야 어찌어찌 지 짝을 만나데유."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영옥씨는 지금도 여전히 야무지고, 김씨 부부에겐 세상 다시 없이 잘 하는 딸이다.

사진 4

강씨는 맏며느리 서영란씨가 "엄칭이 똑똑하다"고 자랑했다. "일두 잘하구. 처음에는 덩치가 좀 있는 게 맘에 안 들어유. 근데 보면 볼수록 아유, 어디서 저런 며느리가 들어왔나. 내게는 너무 만점 며느리가 들어왔다 해유." 그리고 작은아들 철민씨와 며느리 심미애씨 부부. "쟤들도 똑같어유. 철민이가 학교 졸업하자마자 수원 공장 들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근데 어느날 아가씨 만나 결혼한다면서, 아버지헌테 600만원을 줘유. 결혼자금 하라구. 아버지가 '너 결혼 시킬 돈은 있다' 하니까 아니랴. 아가씨랑 돈을 똑같이 나눴댜. 그렇게 애들이 부담 하나두 안 주구 지들이 벌어 결혼했어유." 두 아들은 김씨 부부에게 각각 2녀1남, 1녀2남의 손자를 안겨 주었다.

사진 5

대전에 사는 네 자녀 가족은 세상없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다 모여 부모님과 하루를 보낸다. 따로도 자주 찾아 노부부는 심심할 틈이 없다. "애들이 뭐 하나라도 우리 주려고, 집에 옷.약.물건들 이것저것, 우리 돈 주고 산 게 별로 없어유." 부모라고 가만 있겠는가. 쌀이며 채소, 손수 담근 간장.된장.고추장.담북장, 직접 만든 두부며 동동주, 말린 산채와 들기름.참기름까지. 김씨는 "이제 고향 뜨면 애들헌테 직접 지은 쌀.배추.고추 못 주는 것이 제일 걱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평범한 생활재들은 김씨 가족에게로 와 정이 되고 사랑이 됐다.

글=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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