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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70년 세월의 더께가 앉은 살림살이 그 속에 담긴 정겨운 사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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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연기군 반곡리, 70여 년을 이어살아온 집 대청에 모인 김명호씨 가족.

플라스틱 꼭지가 반쯤 짓무른 냄비, 입부리가 누렇게 변색된 컵.

설을 맞아 친정에 들른 딸이 투덜댑니다.

"아휴, 엄마는 이게 언제적 물건이유? 좀 버리면서 살아요."

어머니는 묵묵부답. 속으로 답할 뿐입니다.

'네가 그 물건들 내력을 알어?

네 할머니가 20년 전 물려준 냄비, 네 외삼촌이 첫 월급 타 사 준 컵이여'.

그렇습니다. 집안 곳곳, 따져 보면 사연 없는 물건이 없습니다.

하물며 70평생, 한집에서 나고 자라 노년을 맞은 촌부일까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 김명호(72)씨댁 이야기입니다.

글=이나리 기자 <windy@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아부지, 추워요. 얼른 들어오세요."

"동서, 상은 세 개만 펴. 동치미 퍼 놨어?"

설을 일주일 앞둔 주말. 반곡리 초입 김명호씨네 집이 떠들썩하다. 근처 도시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이 죄다 모였다. "자주들 와요. 가까이 사니께. 하냥(늘) 좋지유." 순하디 순한 인상의 안주인 강신성(70)씨. 딸 둘, 며느리 둘이 바쁘게 돌아치는 부엌 구석에 앉아 수줍게 웃는다. 두 달 전 태어난 막내 손자를 보물인 양 소중히 싸안고 있다.

김씨 가족에게 이번 설은 각별하다. 어쩌면 내년, 이들은 전혀 낯선 곳에서 설을 맞아야 할지 모른다. 반곡리가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지로 지정된 까닭이다. "평생 내 집, 내 농사, 내 이웃인디…. 어쩔까 모르겄어유." 늘 웃는 얼굴인 김씨지만 폭폭한 마음은 숨길 수 없다.

이곳은 1937년, 김씨의 조부가 새집 올리듯 고쳐 지은 것이다. 그 뒤 60년대에는 지붕 개량, 70년대에는 우물 개량, 90년대에 입식 부엌을 들이고, 2003년엔 실내 화장실을 만드는 등 다른 농가와 비슷한 방식으로 증.개축을 해왔다. 김씨는 이 터에서 태어나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웃마을 얼굴도 모르는 처자를 맞아 2남2녀를 낳고 키워 열 명의 손자를 봤다. 기둥 하나 문틀 하나 부부의 손 안 닿은 곳이 없고, 지나 보니 행복한 추억 서리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이사란 걸 해본 적 없으니 수십 년 묵은 옛 생활 자국도 어제 일처럼 천연덕스럽다.

그 깊은 생활의 흔적을 전문가가 주목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사람들이었다. 사라질 마을의 한 집을 택해 '생활재'(인간이 삶을 영위하며 보유하게 되는 각종 생활용품의 총체) 조사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2005년 10월 시작한 조사는 무려 4개월 동안 계속됐다. 조사원들은 외양간 구석 깨진 사기그릇까지 뒤집어 가며 기록에 몰두했다. 정리한 생활재 수는 5000여 개. 보고서 작성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31일, 조사팀장을 맡은 민속박물관 김호걸 학예연구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김명호씨댁의 생활재에는 한 집안의 가장과 자녀들, 형제자매들, 친척들을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 보였다. 그 중심에는 가장이 너무나도 훌륭하고 자상하게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작은 비닐봉지 하나에도 긴 두루마리에 쓸 만큼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고, 흔한 플라스틱 병이지만 자녀의 효성과 부모의 애정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진하게 사로잡아 버렸다…'.

이달 초 두툼하게 제본돼 나온 '김명호씨댁 생활재 조사보고서'는 가족에게 뿌듯한 선물이 됐다. 책 속에는 귀이개 하나, 덧신 한 켤레마저 사진으로 다 기록돼 있고 물건을 입수한 경위와 어린 사연들까지가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둘째딸 김영옥(43)씨는 "책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감회를 느꼈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 참 다정한 분들이세요. 한푼이 아쉽던 시절에도 집엔 웃음이 있었죠. 욕심 없고 경위 바르시고, 밤잠 줄여가며 일할망정 농협에 빚 한 번 안 지셨어요. 자식들에겐 그저 괜찮다, 뭘 더 줄랴, 착허게 살자…. 그런 부모님 평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어머니 아부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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