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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후진국화/박영철(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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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료마다 그 수치가 다르기는 하지만,지난 한햇동안 소련의 서방국가와의 교역은 수출 3백50억달러,수입 3백20억달러에 달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교역의 측면에서 본다면 소련은 그 규모가 오스트리아와 비슷한 작은 경제에 불과하다. 수출의 70%이상이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가 차지하고 있어 소련이 아직은 1차상품의 수출국임을 알 수 있다.
그 막강한 군사력에 비해 국제적 경제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어서 소련이 경제적으로 침몰한다 하더라도 독일을 제외하고는 그 충격을 느끼는 서방경제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소련이 지고 있는 6백40억달러의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국제자본시장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서방의 원조엔 한계
그런데도 소련 경제의 파탄을 걱정해 원조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경제난이 더 심화됨에 따라 적어도 3백만∼4백만명의 소련난민이 유럽으로 몰려들어올것이고 금년 겨울에는 식량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 예상되며,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고르바초프­옐친의 개혁파는 강경 보수파에 밀려나 소련의 민주화와 경제자유화는 실패로 끝나고 세계는 다시 과거의 냉전체제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가 내란으로 악화되면 그 많은 핵무기의 일부가 과격분자나 집단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는 공포의 시나리오도 있다.
이러한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서방국가의 재정적인 원조는 극히 제한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는 어렵다고 하나 소련은 개인소득이 6천달러를 넘는 군사대국이며 중앙은행은 3백억달러에 달하는 금괴를 쌓아놓고 있다. 식량의 부족은 수송과 배급이 원활치 못해 발생하는 지역적인 문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프리카·남아시아·남미의 수많은 빈민을 외면한채 어떻게 소련에 원조할 수 있느냐고 도덕적인 부당성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방이 해체되고 공화국은 국경선을 긋기 바쁜 이때,돈을 준다면 누구에게 어떻게 무슨 명목으로 줄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무엇보다도 미국·EC·일본은 민주화·경제개혁과정에서 소련의 군사력이 최대한도로 약화되어 더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 나라로 변하지 않는 한,대규모 원조를 제공할리 없다. 최근의 움직임을 보면 미·일·EC는 거대한 지뢰를 분해하듯 소련 군사체제를 엮어 놓고 있는 나사못과 부품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뽑아 내는 소련의 힘빼기 작전에 돌입한 인상을 주고 있다.
○시장경제 여건 불비
결국 소련은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화·경제자유화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 개혁의 전망은 어떠한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당면위기를 극복하려면 소련은 우선 연방부터 해체하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산업구조와 생활수준이 지역별로 크게 다르며 인구가 3억명이나 되는경제를 획일적인 정책에 따라 개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방정부는 이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
반면 개별 공화국들은 그들의 여건에 맞게 신축성 있는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시장경제가 정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좀더 높게 된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찾은 후에도 공화국들은 지역간의 경제적 보완성에 따른 교역,자본과 인적 교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공화국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를 얽어매는 연합체를 형성할 것이 예상된다.
소련경제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단기간에 걸친 급진적이며 전면적인 자유화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화국은 시장경제를 수용할 수 있는 기구나 법적인 제도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공산주의에 젖어온 의식구조를 쉽게 바꾸지 못할 것으로 보아 결국은 급진적인 대안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행히도 점진형 대안이라는 것이 흔히 이윤을 인정하지 않는 자본주의와 계획을 부정하는 사회주의가 복합된 혼합형이 되기 때문에 개혁은 여러 계층과 부문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은 지지부진하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빈곤한 핵보유 국가
소련은 지난 20년동안 서방과의 군비 및 생활수준 경쟁을 하는데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서 산업시설이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한 투자를 계속 뒤로 미루어왔다.
바로 이러한 투자의 부족이 소련경제의 침체를 몰고 왔으며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소련이 경제적으로 되살아 나려면 현재의 소비수준을 크게 낮추어 투자재원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하나 각 공화국은 이러한 희생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군사대국으로서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군비를 줄이지 못하고 능력을 넘어서는 생활수준을 고집하는 한 소련은 급격히 후진국으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인도와 비슷한 핵무기 보유의 빈곤한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그런후에나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생성될지도 모른다.<고려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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