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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만 남은 소 공산당/소련은 어디로 가나(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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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너진 독재… 연방유지하며 개혁 가속/서구식체제 향한 험난한 걸음마 시작
소련에서 마침내 소련 공산당이 사실상 불법화 되었다. 반동적 수구세력이 중심이된 쿠데타가 국민의 저항에 부닥쳐 실패한뒤 그 반동적 수구세력은 범죄세력과 동일시되었고 그러기에 급속한 해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해체의 칼날은 비밀경찰기구인 KGB(국가보안위원회)에 이어 소련 공산당에 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물음들을 갖게 된다. 1917년 볼셰비키 쿠데타를 통해 제정러시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소비예트 국가를 세운이후 74년동안 1당독재의 형태를 통해 소련을 지배하거나 통치했고 그뿐 아니라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총본산 역할을 수행했던 소련 공산당이 어찌하여 이처럼 참담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가.
소련 공산당이 불법화된 이후 소련은 어떠한 길을 걷게 될 것이며 그것은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우선 소련 공산당이 불법화되게 된 배경을 살피건대,이 역사적인 사형선고는 아무리 늦게 잡는다 해도 지난 85년의 고르바초프 체제의 출범과 동시에 예고되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 고르바초프체제가 「소련의 전면적인 개혁과 재편성」을 외치고 나왔을 때,그 수술의 칼은 이미 소련 공산당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비 출범때 예고
이 점은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는 오믈렛이라는 음식을 만들 수 없듯,소련의 기존 지배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울 수 없다』는 고르바초프의 경고속에 잘 나타나 있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새로이 소련의 최고권력자가 된 그가 『기존 지배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역설했을 때 「소련의 기존 지배체제」의 핵심인 소련 공산당의 붕괴와 해체는 이미 점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소련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는 역설적이게도 소련 공산당의 해체를 주장했던가. 아니,고르바초프 한 개인뿐만 아니라 그로서 대표되는 소련의 개혁파는 어째서 자신들의 모체를 깨뜨리자고 한 것인가.
결로부터 말해 소련을 만들어낸 소련 공산당이 어느덧 소련의 역사발전을 가로 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으며 「인민의 적」이 되었음을 그들은 직시했기 때문이었다. 이 거대한 역사발전의 걸림돌을 깨끗하게 제거하지 않고는 소련이라는 국가자체가 마멸되어 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을 그들은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0여년 동안 소련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면서 온갖 특권을 향유해 온 자기선출적 소련 공산당을 해체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다. 3억명의 소련 국민 위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면서 갖가지 기득권을 누려 온 이른바 노멘클라투라집단은 그 막강한 힘의 행사를 통해 약간의 개혁에 대해서도 반대했던 것이다.
현실의 두꺼운 벽앞에서 고르바초프와 그 지지자들은 우선 소련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소련에서는 처음부터 당이 모든 권력의 집합체이면서 사령부로서 국가를 이끌어 갔다. 이것이 『당이 국가를 영도한다』는 당우위론적 레닌주의의 한 부분임은 물론이다.
○권력기구 재편 시도
고르바초프와 그 지지자들은 이 당우위론을 뒤집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의 중심을 당으로부터 국가기관들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이전에 없던 대통령제를 신설해 고르바초프 스스로가 그 자리를 겸하고,또 대통령위원회를 신설해 전통적으로 당 정치국이 행사하던 최종적 권력을 이 기구가 행사하도록 만든 것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이다.
그리하여 어느 한 소련 전문가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지난 한두해 사이에 소련에서 당은 수축되어 온 반면 국가는 팽창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1차적으로 수구적이며 반동적인 노멘클라투라 집단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급진적인 개혁주의자들로부터도 불만을 사게 되었다.
옐친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는 고르바초프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개혁은 「부지하세월」이 되어 마침내 국민적 저항마저 불러 일으키게 된다고 경고한 것이다.
수구파와 급진파의 협공속에서 고르바초프는 무척이나 속을 썩였다. 더구나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들 가운데 가장 큰 공화국인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직선됨으로써 엄청나게 큰 위광을 누리게 된 옐친은 소련을 하루 빨리 서방의 정치적·경제적 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 전환의 속도를 앞당기지 못하는 고르바초프를 윽박지르기조차 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소련이라는 제국적 연방의 존속 문제였다. 소련 공산당이라는 소련의 구심력이 약화되면서,곧 소련의 중앙통제력이 예전만 같지 못하게 되자 일부 공화국들이 원심작용을 계속하면서 연방탈퇴를 도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대세
고르바초프는 신연방조약을 통해 구성 공화국들의 독자적 권한을 보다 확대시켜 주는 선에서 수습하고자 했다. 이것이 수구파에게는 「소련 공산당의 해체음모」에 이은 「소연방의 해체음모」로 비쳐졌음은 물론이며 결국 자신들이 누려온 기득권의 전면 포기로 확대될 것으로 감지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막고자 그들은 소련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획책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너무나 반역사적임이 명백했다. 고르바초프체제가 소련의 전면적 개혁과 재개편을 들고 나온 이후 오랫동안 잠자던 소련의 역사가 다시 광란적 속도로 격동하는 상황에 이미 낡은 시대의 유물처럼 되어버린 반국민적 수구세력의 쿠데타 몸짓은 국민과 세계의 비웃음과 규탄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으며,그리하여 그것은 이른바 「3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다. 수구세력의 곧 쿠데타세력의 본거지인 소련공산당의 해체로까지 급속히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룡시대의 종말을 떠올리게 됨과 아울러 소련 역사의 매우 중요한 새로운 전환점을 보게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달걀이 깨어졌으니 오믈렛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인가. 공산당이 해체되었으므로 소련에서는 새로운 민주질서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그 지지자들은,그리고 급진적 개혁파들은 소련이 서구식 민주복지국가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들의 다수도 이러한 방향을 열망하고 있다. 서방세계 역시 소련의 새로운 국가적 지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한 만큼 소련은 서구식의 다원적이면서 경쟁적인 정치체제를 지향할 것이다. 1당 독제체제를 뼈대로 하는 볼셰비즘 또는 레닌이즘이 파산된 상태에서 소련의 대안은 서구식 민주체제일 수 밖에 없다.
○이미 낡은시대 유물
그렇다고 그 전환이 반드시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는 한마디로 전제주의와 권위주의 연속의 역사였으며 그것이 정점에 이르렀던 것이 소비예트 러시아의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전통을 고려할 때,이제 막 발을 내디딘 소련에서의 민주주의로의 전환행보가 과연 순탄하고 성숙될 것인가에 대해 낙관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공산당과 공산주의의 몰락은 되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대세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어느 세력도 공산당과 공산주의를 역사의 공동묘지에서 되살려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국제 공산주의 사회에 주는 의미는 자명해진다. 서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공산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조종은 이미 널리 울려퍼지고 있다. 북한도 예외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공산주의의 운명이 이렇다고 할때,다시 소련으로 돌아와 말한다면,소수민족들의 분리자치운동 또는 분리독립운동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철저히 탄압했던 민족주의가 이제는 활성화의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 소련은 엄연한 우리의 친구다. 지난해의 수교를 통해 우리나라와 소련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우호관계에 들어선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주주의로의 출발을 다짐하는 새 친구의 앞날이 순탄하기를 기원하고자 한다.김학준<대통령 정책조사보좌관·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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