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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포퓰리즘' 추방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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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 장면 1.

5일 오후 9시40분 서울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자영업자 김모(42)씨가 "왜 죄 없는 사람을 잡아왔느냐"며 경찰관의 멱살을 잡고 행패를 부렸다. 김씨가 술에 취해 버스 정거장에서 쓰러져 자고 있던 것을 경찰이 지구대로 데려와 보호하던 상태였다. 10여 분간 난동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경찰이 수갑을 채웠다. 김씨는 "민주화 시대에 이런 악질 경찰이 어디 있느냐"며 다시 막말을 퍼붓고 소란을 피웠다.

# 장면 2.

지난해 말 미국 뉴욕 퀸스의 주차금지 구역에 70대 중국계 노인이 차를 세웠다. 순찰 중이던 중국계 여자 경찰이 발견하고 딱지를 끊으려 했다. 노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했지만 경찰은 무시했다. 다급해진 노인이 무심결에 주차 위반 통지서를 쓰고 있는 경찰의 팔에 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흑인 경찰은 노인을 내동댕이친 뒤 현장에서 체포, 경찰서로 연행했다. 공무집행 방해 혐의였다.

한국과 미국에서 공권력의 대우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이 '공권력(空權力)'이란 비아냥을 받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술 취한 사람(주취자)의 난동은 일선 경찰 지구대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휴지조각 취급을 받기 일쑤다.

지난해 5월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시위에서 시위대가 죽봉 등을 휘둘러 경찰 145명이 다쳤다. 하지만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는 불법 시위를 한 시위대와 공권력을 행사한 경찰에 대해 똑같이 "한 발짝씩 물러나라"고 했다. 우리 현실이다.

지난해 11월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대가 관공서에 난입해 유리창을 깨고 담벼락에 불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심회 사건 공판에선 방청객들이 판사들에게 "개××야" "미제의 앞잡이"란 욕설을 퍼붓는 일까지 벌어졌다.

공권력의 실종은 사회적 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발표한 '불법 폭력 시위로 인한 비용에 관한 연구'에서 2005년 집회.시위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최대 12조3190억원으로 추산했다. 그해 국내총생산(GDP.805조8858억원)의 1.53%에 해당하는 액수다.

◆실정법 위에 있는 '국민정서법'=민주화가 진전될수록 공권력의 집행은 엄정하다. 그러나 한국은 거꾸로다. 경찰대 이상안(행정학) 교수는 "민주화 이후 인권이 부각되면서 공권력이 법과 원칙보다는 임기응변식 대처에 치중하는 '치안 포퓰리즘'에 빠져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불법 행위를 법으로 단죄하는 게 아니라 정치논리에 따라 타협하는 바람에 '국민정서법'이 실정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 치안 포퓰리즘이 만연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서 벗어나려면 치안 포퓰리즘과 손을 끊고 불법 폭력행위는 법대로 하는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무관용)' 관행을 확립해야 한다. 일례로 1999년 경찰 수뇌부는 무(無)최루탄 원칙을 세우고 "시위대의 어지간한 폭력은 참아라"는 이른바 '인내 진압'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인내 진압은 불법.폭력 시위를 근절하는 데 실패했고, 경찰만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비판도 듣고 있다. 동국대 이황우(경찰행정학) 교수는 "우리나라에선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조그만 법질서 위반은 괜찮다는 풍조가 이어져 불법시위.법정난동.공무집행 방해 등이 빈발하고 있다"며 "공권력을 무시하는 행위에는 형사적.민사적 책임을 묻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발표한 이론. 건물주가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나중에 이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한다는 것. 작은 무질서를 가볍게 여기면 나중에 심각한 범죄를 불러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철재.한애란.천인성.권호(이상 사회부문) 기자,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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