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의 길은 미래에 있다(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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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15 해방의 날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일제 36년간 우리 민족 모두가 겪었던 고통과 모욕을 되씹고,지금까지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동포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길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금 격변하고 있는 동아시아 정세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일이 그와 같은 과거 집착적인 울분 때문에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냉철히 따져볼 때 일제 36년의 오욕을 청산할 수 있는 힘은 우리만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만으로는 역부족임을,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소홀히 했던 문제들을 지금껏 시원하게 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방 46주년을 뜻있게 보내는 일은 또다시 울분을 토하는 것 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과거 예종의 치욕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새로 형성되고 있는 아시아의 새질서에서 피해자 아닌 주역으로 발돋움하는 길을 준비하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일본은 실질적으로 새 아시아질서의 구축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미소의 군사력이 퇴조하는 속에서 새 질서의 동인은 경제력으로 바뀌고 있다. 그리고,그 경제력은 일본이 쥐고 있다. 우리가 아직은 경제적 실익을 내다보기 어려운 중소와의 외교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동남아시아를 산업기지로 독점하고 있고 중소,심지어는 북한까지도 같은 맥락에서 공략하려는 원대한 청사진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 정부·정당의 중진들이 분주히 이 지역의 수도를 왕래하고 있는 요즘 상황은 이 작업이 얼마나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해 우리 정부는 얼마만한 비중을 갖고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유엔동시가입도 중요하고 북방외교의 완결,거기서 비롯되고 있는 남북한 관계의 개선도 물론 중요한 대외적 과제다.
그러나 보다 긴 눈으로 본다면 바로 우리 문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경제질서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해 나가느냐는 과제야말로 경제입국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사활적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태동하고 있는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협력에 관한 여러갈래의 움직임에 보다 역점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행사로서 10월 서울에서 열릴 제3차 아시아­태평양경제각료회의(APEC)를 들 수 있다.
이 모임은 다양한 문화와 역사적 전통 및 경제개발 수준상의 격차를 가진 이 지역 나라들이 서로간의 이익을 조화시킴으로써 어느 한쪽의 희생없는 공동의 번영권을 이룩하느냐 하는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구·미주 등이 차츰 경제 블록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이 시대에 시급히 성사시켜야 할 지역적 과제다.
문제는 이 역사적 작업이 한 둘의 경제강국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모든 당사국들의 이해를 조화시키는 실질적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과 중국등 잠재적 경제 강국이 적극적인 견제역할을 맡아야 된다고 본다.
우리는 극일을 이야기하고 우리 경제의 대일 의존도의 심화를 걱정해 왔다. 이에 대한 해답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있음을 냉철히 인식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다시 맞는 해방의 날을 기리는 참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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