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중국, 12월 대선 판세 읽기 경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장면1

2006년 5월 21일 아침. '면도칼 테러'로 입원 중인 한나라당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싱가포르에서 전화가 왔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였다. 그는 입을 열지 못하는 박 당시 대표 대신 당 관계자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날 오후엔 중국 공산당의 왕자루이(王家瑞) 대외연락부장 명의의 화환과 쾌유를 비는 전보가 병실에 배달됐다.

#장면2

2006년 10월 하순. 중국 정부기관인 사회과학원의 한반도연구센터 책임자가 보름 남짓 서울을 방문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각계 인사 30여 명을 면담했다. 그는 한 면담자에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데 한.중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한국의 12월 대선 판도와 흐름을 읽기 위한 미국과 중국의 노력이 치열하다. 두 나라 정부는 대선 유력 주자들의 정치 성향, 외교 인식, 인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자들의 대외비 스케줄엔 미.중 인사들의 면담 일정이 포함돼 있다.

미국 쪽에선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와 국무부에서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힐 차관보가 나섰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명박.박근혜.손학규.정동영.김근태씨 등 유력 주자들을 적당한 간격으로 만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 쪽 인사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도 서울을 방문해 대선 상황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힐 차관보는 6자회담차 한국에 들른 4일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을 롯데호텔 등에서 차례로 만났다.

국무부 고위 관리가 대선의 해에 한국을 방문해 같은 날 야당 주자 두 명을 만나는 건 "이례적"이라고 8일 한나라당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2002년 대선 때 반미 이슈는 미국 외교의 좌절과 낭패의 상징이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미측은 주자들의 면모를 깊숙이 알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황을 잘 아는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2002년 미선.효선양 사건이 반미 정서로 급속히 확산됐고, 노무현 정부의 탄생 예측 실패로 외교상 큰 어려움을 겪게 된 게 미 정부가 올해 대선에 민감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노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이 미국 국무부나 주한 미 대사관에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며 "차기 주자들을 두루 긴밀하게 만나는 것도 그런 실패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미측의 전략적 목표는 한국 대선에서 반미 문제가 다시 쟁점화하는 걸 막고 선거 결과에 대한 예측력을 높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버시바우 대사는 종종 주자들을 만나 '대선을 어떻게 전망하느냐' '출마한다면 상대 후보는 누구로 보느냐' '대결 결과를 어떻게 전망하느냐' 같은 예민한 질문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주자들은 "북한 김정일 정권이 한국의 대선 때 개입하지 않도록 예방해 달라"는 식의 요청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 쪽에선 류훙차이(劉洪才) 당 대외연락부 부부장과 닝푸쿠이(寧賦魁) 주한 중국 대사가 주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외교가에 소문이 퍼져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대외연락부는 한국 일간지에 실리는 주자들의 사진 게재 순서의 변화까지 감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류 부부장은 이달 하순 한반도 전문가 5명을 이끌고 방한한다. 박 전 대표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만날 계획이다. 닝푸쿠이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인맥을 넓히고 있다.

중국의 목표는 김대중 정권 이래 10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 내 친중 분위기를 차기 정부에서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념상 친미적인 한나라당 정권이 등장해도 중국의 영향력이 훼손되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박 전 대표가 지난해 11월 방중 때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으로부터 "대통령이 되십시오"라는 덕담과 함께 국빈 예우를 받은 것도 이런 해석과 무관치 않다.

한국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비롯된 유력 주자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것도 중국 측이 유의하는 사항이라고 한다.

미.중 정부의 움직임은 동아시아의 전략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경쟁의 성격도 있다. 차기 정권이 자주 노선이냐, 친미.친중 노선이냐에 따라 한국과 주변 4강의 관계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부탁한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미.중 인사들이 차기 주자들과 면담한 결과는 본국 정부와 의회에 보고돼 정책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된다"며 "차기 주자로선 책임 있고 조심성 있는 만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양수.김정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