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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1920년 내가 보통학교 3학년 되던 해에 동아일보가 나왔다.
새로 온 사이토(@등실)총독이 조선사람들한테 신문을 발행하도록 허가를 해서 동아·조선·시사신보등 3개 신문이 동시에 나왔는데 그중 제일 인기있는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였다.
우리 집에서도 이 신문을 구독하기로 했는데 저녁때 이 신문이 오면 서로 먼저 보려고 법석을 떨었고 이튿날 아침이면 동네 사람들이 신문을 빌려갔다.
일본의 민예 연구가인 야나기(유종열)가 동아일보에 「조선의 벗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야나기는 조선의 예술을 깊이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한 가장 양심적인 일본학자였다.
독립만세가 일어나자 그는 요미우리신문(독매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하며」라는 조선사람을 몹시 동정하는 글을 써서 재일조선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동아일보외에 실업가들이 발행하는 조선일보가 있었다. 또 친일파 민원식이 발행하는 시사신보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신문을 본 일이 없다.
기름집에 모이는 사람들과 우리집에 자주 드나드는 종형은 동아일보의 열렬한 애독자여서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그러면서 신문기사가 총독정치를 날카롭게 지적하지 못해서 싱겁다고 늘 불만이었다.
그러던 차에 9월 어느날 일본의 소위 「삼종의 신기」를 비웃는 사설을 썼는데 이를 빌미로 총독부는 동아일보를 무기정간시켰다. 「삼종의 신기」란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3가지 신기로 일본 왕위를 상징하는 칼·구슬·거울등을 말한다.
무기정간이란 기한이 없이 무작정 신문을 못내게 하는 것으로 신문경영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다음해 1월에 정간조치가 풀리기는 했지만 경영상 막대한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정간 중에 손병희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계자들의 판결이 있었고, 그밖에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해에 천도교에서는 월간 종합잡지로 『개벽』을 발간하였다. 정치·경제를 다루는 고급 잡지였으므로 이 잡지를 들고 다니는 것이 젊은 인텔리들의 자랑이었다. 소학생인 우리들은 부러운 눈으로 이 지식청년들을 바라보았다.
독립운동이 일어난 뒤로 경향 각지에서 청소년들의 향학열이 대단해졌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서울에는 학비를 학생 자신이 마련하는 고학생이 생겼다.
앞서 말한 북경물장수는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물장수라도 했지만 그럴 처지도 못되는 청소년 학생들은 무슨 일을 해서든지 자신이 학비를 벌어서 대야 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 고학생회가 생겼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상재·윤익선등이 「고학생회 구제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고학생회와 동시에 「칼톱회」라는 것이 생겼는데 이들은 대개 야간에 빵을 팔러 다녔다. 밤 9시가 넘어서 이들은 『겐마이(현미)빵』하고 외치면서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밤중에 이렇게 외치고 다니는 것이 애처롭게 들려서 우리들은 5전을 들고 나가서 이 방을 사다가먹기도 하였다.
그때 보통학교 3학년이었지만 우리들은 숙성한 편이어서 지금의 중학생만한 지식이 있었다. 나이로 말하면 내가 제일 어려서 열 두살밖에 안되었지만 열대여섯된 애들은 어른 행세를 하였다.
이런 나이 먹은 애들은 학생잡지『학생계』를 사보고 더 숙성한 애들은 『폐허』라는 문학잡지도 사보았다.
그 무렵 윤심덕이란 유명한 여류가수가 일본에 가서 레코드판에 유행가를 취입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애들은 총독부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해서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떠들었다.
더구나 조선역사와 지리 대신 일본역사와 지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안된다고 반대하였다. 나이가 어린 나도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같이 떠들었다.
그때 서울 북쪽에는 중국사람들이 경영하는 호떡집이 골목마다 있었는데 애어른들이 이 호떡을 많이 사먹었다.
밀가루 반죽을 한 둥그런 빵떡속에 시커먼 흑설탕을 넣어서 석탄불에 구운 것인데 맛이 달고 좋았다. 한 개에 5전으로 두개만 먹으면 요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호떡집에 모여서 수다를 떨기가 일쑤였는데 나도 이 무렵부터 나이 먹은 애들한테 끌려서 호떡집을 출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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