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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고달픈 서민들|상점에 물건 많아도 돈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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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9년 민주화혁명으로 동유럽 공산정권이 차례로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설 때 대부분 동유럽 사람들은 자신들도 이제 서방 국민들처럼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기를 기대했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고 빵·육류 등 기본식품을 구하기 위해 상점 앞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야하는 「부족의 경제」를 새로운 시장경제가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다.
시장경제는 실제로 몇 가지 「기적」을 이뤘다. 텅 빈 진열대뿐이었던 상점에 물건을 가득 채우고 암시장에서 이뤄지던 거래들을 광장으로 끌어냈으며 강압에 의한 낭비적 계획경제 대신 개인의 창의성이 보장되는 활발한 사적 경제활동이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시장경제는 동유럽인들이 지금까지 겪지 못한 새로운 재앙도 함께 안겨주었다. 실업·인플레·빈부격차 등 시장경제가 안고있는 부정적 요소들이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에 익숙한 동유럽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동부역에선 매일 오후 4시30분 시보건국에서 관리들이 나와 집 없는 부랑자 즉 홈리스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저녁식사를 무료 제공한다.
이스트반 밀레씨(56)는 배식 라인에서 빵과 음료수를 받아들고 역사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식사를 마쳤다. 밀레씨는 오늘밤 이곳에서 잠자리를 찾을 것이다.
밀레씨가 홈리스가 된 것은 89년 10월. 주택건설 노동자이던 그의 일자리를 임금이 훨씬 싼 루마니아인 노동자가 차지, 실업자가 됐다.

<집세 못내 쫓겨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돈을 벌 수 없었고 돈이 없으니 집세를 낼 수 없어 홈리스가 됐다. 가족들과도 「잠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밀레씨가 생각한 잠시는 그 뒤 1년 반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곳 동부역 부근엔 약 l천명의 홈리스가 상주(?)하고 있으며 규모가 더 큰 부다페스트 중앙역엔 1천5백∼2천명이 진을 치고 있다.
부다페스트 시 당국은 헝가리 전체 홈리스 3만 명 중 약 1만 명이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헝가리에서 홈리스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89년 겨울. 89년12월 부다페스트 시 당국은 부다페스트 시내 블라하루자 광장지하도에 홈리스들이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헝가리 사회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약20만 명이 경제적으로 「홈리스 예비군」상태에 있는 것으로 집계돼 앞으로 홈리스 숫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노동 기피가 죄악시되던 공산치하에서도 헝가리에 소수의 홈리스는 있었다.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탄·청소년가출·알콜중독·기타 사회부적응으로 인한 홈리스들이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나 최근 헝가리에서 부쩍 늘고있는 홈리스는 그 성격상 전혀 다르다. 바로 실업으로 인한 것이다.
부다페스트 시 사회정책 및 보건국 홈리스 담당 소보이 유디트 국장은 최근 홈리스 증가의 근본원인을 시장경제정책에 따른 민영화조치에서 찾는다.
국영기업의 민영화에 따라 적자기업들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이 노동자 숙소를 쫓겨나거나 집세를 낼 수 없게됨으로써 거리로 내 몰린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헝가리는 주택 임대료 체납주택이 6만5천 가구에 이르고 있으며, 전체 가구의 20%가 전기·가스·수도요금을 체납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럼에도 불구, 헝가리 정부 당국은 별다른 대책이 없다. 현재 부다페스트 시에서 시·자선단체 등이 운영하는 홈리스용 베드는 불과 1천개 뿐이다.
이 때문에 홈리스들은 기차역·버스터미널 등을 전전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막사에서 집단 거주, 지역주민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헝가리에 실업이 늘기 시작한 것은 새 정부가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표방하면서부터다.
지난해 5월 출범한 요제프안탈 총리가 이끄는 새 헝가리 정부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경제정책의 제1목표로 삼고 국영기업 민영화·중소기업 육성에 주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플레·실업·생활수준 저하가 뒤따랐다. 헝가리는 지난해 GNP 마이너스 4% 성장·인플레 29%·실업 1.7%(8만명)를 기록했다.
금년예상은 더욱 어둡다.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는 금년도 헝가리경제를 경상수지적자 15억∼20억달러·인플레 50%·실업 6%(30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경제연구소 미할리 라키 교수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생활이 개선됐다고 응답한 사람은 불과 10%였으며, 전체의 3분의1이 실업을 우려, 민영화에 반대했다고 소개한다.
라키 교수는 국민들의 지지 없이 무리하게 민영화를 추진할 경우 탈 정부는 앞으로 상당한 정치적 리스크를 안게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업 해소책>
막연 동유럽국가들이 시장경제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인 민영화과정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기업 도산→실업양산은 현재 동유럽이 당면한 최대의 위협이다.
이 같은 실업자군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은 기업 민영화와 합작, 또는 직접투자를 통한 외국자본 유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제비교경제연구소는 금년 1·4분기 동유럽 각국의 공업생산이 지난 연말에 비해 13% 하락했으며 급격한 경제긴축, 소련·동유럽 역내교역 감소를 주요 원인으로 들고 있다.
한편 이 같은 경기침체 속에서도 물가상승이 계속, 서민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폴란드는 지난해 2백50%의 인플레를 기록했으며 금년도 1백%에 육박하리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서민아파트 집세는 지난해 1월 경제개혁 이후 4백%나 올랐다. 이에 반해 임금인상은 「물가상승률의 60%이내 동결」원칙이 철저히 지켜지기 때문에 서민들은 수입의 절반이상을 주·식비로 지출하는 내핍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다.
바르샤바 교외의 방 3개인 아파트에서 남편·두 딸과 4식구가 함께 사는 이자벨라부코프스키씨(36)는 3년전 월 1만5천 즐로티였던 집세를 지금은 18만 즐로티나 내야 한다면서 『이제 상점에 물건은 가득하지만 돈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푸념한다.
이자벨라 여사는 또 옛날엔 상점 앞에 줄을 서며 보내던 시간을 이제는 아르바이트에 쓰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고 한탄한다.
대부분 동유럽인들에게 부업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자구수단이 되고 있다. 택시운전사·개인상점·자동차정비·식당·화원·주택수리 및 건설, 심지어 마사지 팔러·포르노 숍에까지 뛰어들고 있다.
일부 헝가리인들은 2중 직업으로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체코에선 약 35만 명이 부업전선에 나서고 있다.
동유럽인들이 현실에 대해 실망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서방측의 무관심 때문이다. 특히 걸프전 후 동유럽이 세계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소련에 대한 지원에 치중한 나머지 동유럽이 세계 여론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걸프전 복구사업에 필요한약 4천억달러의 자본수요는 세계자본시장을 고갈시켜 동유럽이 필요로 하는 서방자본유치를 매우 어렵게 할 것이 틀림없다.
세계은행 추계에 따르면 현재 동유럽이 필요로 하는 자본수요는 연간 2백20억∼2백30억달러에 달한다.
지난 4월 정식업무를 개시한 동유럽 경제지원을 위한 유럽개발은행(EBRD)은 자본금이 1백20억달러에 불과하며, 금년도 대동유럽지원에 겨우 3억달러를 책정해 놓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독재 우려>
미국의 경우도 금년도 대동유럽 경제지원 규모는 4억5천1백만 달러에 불과하며 이중엔 EBRD 출사금 7천만달러가 포함돼 있다.
이 같은 규모의 돈은 동유럽에 마치 화로 위의 물 한 방울과 같은 미미한 것이다.
동유럽인들은 이 같은 서방측의 냉대에 대해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다. 레흐바웬사 폴란드 대통령은 서방의 동유럽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강물에 빠진 사람을 놓고 동정심을 갖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구명대를 던져주는 사람은 없다』고 비난한다.
부다페스트 유럽통합협회장인 경제학자 칼만 페치 박사는 『서방 국가들은 개혁작업 부진에 따른 동유럽의 사회·정치적 불안을 보고 지원을 더욱 늘림으로써 상황의 호전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정치불안을 이유로 지원을 축소하거나 기피하고 있다』고 서방측의 무성의를 비판하고 있다.
지금 동유럽은 2년 전 민주화 혁명을 쟁취하던 그때의 환희와 행복감은 사라지고 대신 현실의 참담함과 고통, 그리고 정치·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같은 혼란은 자칫 민중의 불만 폭발로 이어져 민주화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동유럽 각국에선 이미 국민의 불만을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독재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동유럽에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혼란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주목되는 상황임에 틀림없다. <글 정우량 특파원 사진 신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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