닦고 고치기 37년-안암골"구두 총장"|고대교내「신기료 아저씨」고광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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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37년째 고려대 교정에서 학생과 교직원들의 구두를 닦고 고쳐온「신기료 아저씨」고광규씨 (52·서울 성북구 안암동) .
그 동안 고씨가 돌봐준 구두수가 수십만 켤레에 달해 그는 흔히「구두총장」으로 불린다.
그러나 수십년을 학생들 틈에 끼어 살아온 고씨 자신은 정작「늙은 학생」임을 자처한다.
『4·19혁명 하루전인 4·18고대 데모 때였지요. 제 나이 또래인 이세기씨(전 국회의원) 의 주도로 데모가 시작 됐는데, 저녁 무렵 부상학생들이 속출했지요. 그때 다친 동료학생들을 부여잡고 이씨가 울먹이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찡 합니다.』
배운 것이 없어 당시 데모의 의미를 잘은 모르지만 이 나라의 민주화에 학생들의 기여가 컸다고 고씨는 믿는다.
그러나 데모를 격렬하게 하면 최루탄 때문에 역시 매우 괴롭다.『장사가 잘 안 되는 것은 괜찮지만 젊은 학생들이 경찰에 쫓길 땐 안타깝습니다. 학생데모가 없는 평안한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며 그는 안타까워했다.
『사회가 변했지만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바 없습니다』라고 「학생예찬론」을 펴는 고씨는 학생들 때문에 교문 밖 출입을 삼가야할 때도 있었다.
『교문만 나서면 이 학생, 저 학생이 막걸리를 마시자고 붙잡고 당기는 바람에 아예 도망치다시피 퇴근한 적도 많지요.』
고씨는 지금껏 구두수선 문제 등을 놓고 학생들과 다툰 적이 한번도 없다. 『마음에 안 들게 고쳐 놓은 신발도 많을 텐데 학생들이 워낙 수더분해 그냥 신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고 그는 웃는다.
학기 중엔 하루 30켤레 안팎의 구두를 만지는 그는 설·추석명절과 「고연전」때만 쉴 뿐 1년 내내 오전8시 출근, 오후 7시 퇴근을 지키고 있다.
요즘 같은 방학중엔 하루 10여명의 학생손님이 가게를 들르는 정도여서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빠듯한 수입이지만「학교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학교 안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구두수선을 하다가 지난 85년 2평 남짓한 가건물을 지어 정착한 후로는 비가 오나 눈이오나 안심하고 구두를 손볼 수 있어 좋다고 고씨는 말했다.
『성질 급한 사람을 보면 구두 굽 바깥쪽이 지나치게 많이 닳는 경향이 있습니다』며 평소 여유 있게 살아갈 것을 강조했다.
전남 장성출신의 고씨가 상경한 것은 16세 때. 빈농의 아들로 하루 한끼밖에 못 먹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서울역 앞에서 펨푸짓을 해가며 청계천에서 거적을 덮어쓰고 잔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20세, 17세 된 아들이 아버지의 이런 고생을 이해하려들지 않아요. 물론 철이 덜 들어서겠지만…』
어찌어찌 하다 고대에 자리잡은 고씨는 31세 때 중매로 고향마을 근처에서 현재의 부인 박씨(41)를 만나게 됐다. 박씨는『사실 남편이 구두수선을 하는 줄은 한참동안 몰랐어요. 그런데 비오는 날만 되면 일을 나가지 않더라고요. 그때서야 남편의 직업을 알게 됐지요.』
남편 고씨의 얄팍한 수입으로 생활이 어렵자 박씨는 막내아들이 네살쯤 됐을 때 두 아들을 떼어놓고 남편의 일을 거들었다. 박씨는『20대였던 당시 같은 또래였던 남녀교직원들의 구두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정말 많은 눈물을 뿌렸다』고 회상한다.
고씨는 자신이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던 지난 88년을 빼놓고는 시부모생신이면 꼭 남편고향을 찾는 아내의 고운 심성을 내심 잘 알고 있지만 평소 그는 이런 마음을 아내에게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박씨는 9년 전 자궁의 종양을 떼 내는 수술을 받은 후 몸이 좋지 않아 최근에는 가끔씩만 남편의 일을 돕고 있다.
『88년은 악몽 같았습니다. 1월·4월·7월등 세 차례에 걸쳐 디스크수술을 받은 후 1년6개월 동안 몸져 누워있을 때 아내의 고생이 말도 아니었을 겁니다 .』
그러나 박씨는 이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남의 큰 도움을 받고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고대 학생·교직원들이 병원비에 보태라고 1백12만3천원을 모금해준 것이다.
자신과 아내의 눈물과 땀이 밴 수선용 헝겊을 무릎에 댄 채 고씨는 오늘도 자신이 고쳐준 신발을 신은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바른길을 걷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고씨는『이 학교 이공대에서 쌍둥이 동생 광철이도 25년 이상 구두수선을 해오고 있다』 며 어렵게 털어놓는다. 동생이 이 사실을 세상에 공개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사실 고씨는 요즈음 자녀들 문제로 말못할 고민에 빠져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제 아비 직업이 구두 만지는 일이라는 게 큰 불만인 모양이에요. 전들 더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을 갖든 정직하게 열심히 사는 것인데…비리나 저지르는 국회의원·고급관리보다는 제가 훨씬 떳떳합니다.』 막내 아들도 속을 썩였다. 지난해 겨울 막내아들이 본드를 흡입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추운 날씨인데도 이 녀석이 집에서 웃통을 벗고 씩씩거리더군요.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어요.』
순간 그는 눈에 불이 튀어 연탄집게로 막내아들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구두 밥」을 먹으며 살아왔지만 지금껏 남부끄러운 짓은 한번도 저질러본 적이 없는 그에게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줄로 믿었던 막내의 그런 행위는「죽음」을 생각케 했다.
그러나 고씨는 곧『막내의 비행이 부모로서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죽기 전에 자식을 반듯하게 돌려놓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녀석도 제 마음을 알고 요즘은 바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방학이어서 텅빈 교정 한 귀퉁이에서 지내는 그는 봄철 대학축제 때는 자신도 덩달아 신이 났다며『이곳에서 구두수선을 해간 학생들이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넥타이를 매고 찾아올 때가 가장 반갑다』고 말을 맺었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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