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버려야할 「빨리빨리 증후군」(권영빈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해 여름 중국여행을 위해 향항에 잠시 머무를 때였다. 입실절차를 마치고 손가방을 챙긴후 열려있는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다음 점잖게 「닫힘」단추를 눌렀다. 외국인들로 빼곡히 들어찬 승강기의 밀폐된 공간에 일순 긴장감이 돌고 있다는 느낌이 뒷덜미에서 전해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옷차림이 잘못된 것인가,등뒤에 무엇이 붙어있는가,영국인 호텔에 동양인이 들어온 탓인가,온 몸이 굳어진채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내려야할 층의 신호가 켜지면서 문이 열렸다. 내가 내릴 준비를 하자 모두가 황급히 길을 열어주지 않는가. 엉겁결에 뭇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정해진 객실에 들어섰지만 승강기속의 극진한(?)예우의 까닭을 안것은 몇차례 같은 승강기를 타면서 주의깊게 관찰한 다음이었다.
그들은 결코 승강기의 문이 자동으로 닫힐 때를 기다렸지 성급히 「닫힘」단추를 누르지 않았다. 불과 2,3초간을 기다리지 못해 닫힘 단추를 눌렀다면 이는 분명위급한 사태에 처한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긴장했고 황급히 나갈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승강기를 타면 즉시 떠나야하는게 몸에 밴 서울 사람의 습성이 뜻밖의 장소에서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확인되 경험이다.
이 「빨리 빨리」증후군이 언제부터 우리의 습성으로 굳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젠 세계에까지 알려진 한국인 특유의 기질이 되었다. 그습성의 부정적 측면마저 되돌아보지 않은채 모두가 「빨리 빨리」대열에 기꺼이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빨리 빨리」증후군은 「화끈하게 밀어붙이고 왕창 때려짓는다」는 실천력으로 미화되고 포장되면서 「차근 차근 사려깊게」와 같은 어휘의 표현은 겁많은 좀팽이의 무기력한 행동에 적용될뿐인 세태가 되었다.
자,그렇지만 화끈하게 밀어붙여 왕창 때려지은 신도시 건설의 1년 성과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장황히 거론할 필요도 없이 모래성의 도시를 짓느라 건자재·인력·자금이 동나는 난리를 겪고 부실공사가 적발되면서 분양은 연기되었다. 다행이라면 완공이전에 문제점이 드러나고 개선책이 검토되었다는 점이다.
유신에서 5공까지 전력만이 국력이고 산업화로 가는 길이라해 화끈하게 밀어붙이고 왕창 때려지은 결과 80년대 중반 예비전력이 50%나 남아도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신도시 건설이 「빨리 빨리」증후군의 부정적 측면이라면,조선전기시절의 발전량 36만㎾가 2천1백만㎾로,시설면에서 57배라는 경이적 발전을 이룩한 한전 30년사는 긍정적 측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전 30년의 발전사가 개발독재의 긍정적 산물이라면,민주화 갈등 시기속의 신도시 건설은 「빨리 빨리」증후군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전자가 막강한 지도력과 통제력으로 밀어붙인 권위주의 시대의 성공사례라면 후자는 분출하는 국민적 욕구에 떼밀려 부랴부랴 때려짓기 시작한 급조건설이었다. 전자는 원자력발전소를 짓는다해 주민들의 저항에 부닥칠 때도 아니었고 설령 저항이 있었다한들 엄포 한방으로 쑥들어가버리는 통제된 사회였다. 신도시 건설은 핵폐기물 저장소를 짓겠다는 발표도 있기전에 예상지역 주민들이 집단난동을 벌이는 민주화욕구 분출시점에서 추진된 대역사였다.
시대가 바뀐만큼 정책의 대응방식도 달라야 했다. 「빨리 빨리」증후군에서 탈피하고 사려 깊고 차근차근한 대응방식을 택했어야 옳다. 한국전력의 경이적 발전이라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왜 금년 여름은 제한송전을 할 수 밖에 없고 전기요금을 부분적으로 올려야하며,다시금 절전캠페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가. 이 또한 민주화시대의 정부정책이 시대환경에 부응하지 못하고 여론에 떼밀리고 표피적 인기에 영합한 결과이며 이에 편승한 중산층의 탐욕스런 욕구가 몰고온 이 시대의 한 상징이라고 본다.
87년 민주화시대이후 신설 발전소는 거의 없다시피 중단된 상태속에서 88올림픽의 열기에 떼밀려 모두가 「소비가 미덕」인 사회를 구가했고 정부 또한 그런 환상을 부추겼다. 창문없는 유리의 성이 도심 한가운데 우뚝우뚝 솟아나면서 의정부시의 전력량과 맞먹는 63빌딩이 세워지고 제주도 전체의 전력량을 소비한다는 무역센터가 들어서면서 냉방용 전력이 전력 총소비량의 20%를 넘어섰다.
이젠 그나마 화끈하고 왕창 때려짓는 사회간접투자나 설비도 팽개친채 모두가 화끈하게 먹고 마시고 왕창 써버리는 대열에 떼지어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전력이 바닥나고 예비율이 4.5%로 떨어지면서 산업체의 제한송전이 이미 시작된 상태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정부를 비난하고 한전에 불평을 토하며 곰 발바닥과 온갖 영약을 찾아 떼지어 몰려다니는 어글리 코리안을 향해 손가락질 해보았자 나머지 굽혀진 네 손가락은 언제나 손가락질하는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정부,한전,건설업체,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빨리 빨리」증후군에 사로잡힌채 화끈하게,왕창 밀어붙이고 때려짓고 때려 먹고 와장창 망해버리는 악습에 젖어 있음을 서로가 인정하자. 차근차근 사려깊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관습을 재정립하는게 민주화시대의 삶의 방식임을 우리 서로가 확인하자.
우리 모두 지금부터 승강기의 문이 저절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작은 인내를 키워 보자. 「닫힘」단추 한번을 누를 때마다 엄청난 전력이 소모된다는 가상아래 저절로 닫히기를 기다려보자. 그 2,3초의 짧은 인내가 절전과 절약의 미덕을 소생시키면서 「빨리 빨리」증후군을 치유하는 단련의 기회가 되도록 하자.<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