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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치천 중국 전 외교부장 회고록 '외교 십기' 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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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첸치천(錢其琛.75)은 흔히 중국 외교의 대부(代父)로 불린다. 1988년 외교부장에 취임, 지난 3월 부총리에서 물러나기까지 15년간 중국 외교를 대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회고록 형식의 책을 냈다. '외교 십기(十記)'라는 제목으로 한평생에 걸쳐 다룬 10대 주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이 중 다섯번째가 한.중 수교의 비화다. 다음은 주요 대목.

◇평양행=양상쿤(楊尙昆)주석과 함께 아프리카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92년 7월 12일 장쩌민(江澤民)총서기에게서 한.중 수교와 관련, 북한의 양해를 구하기 위한 대표로 내가 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3일 뒤 중국 공군 전용기로 평양 순안 비행장에 내렸다. 북한은 늘 공항에 대규모 환영 인파를 보내곤 했는데 이날은 김영남(金永南)외교부장 한명이 마중나왔다.

그는 나를 헬기에 태워 멀지 않은 호숫가의 별장으로 데려갔다. 오전 11시, 김일성(金日成)주석을 만나 江총서기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중국은 국제 정세와 한반도의 상황 변화에 따라 한.중 수교 회담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다 …'. 金주석은 한동안 사색에 빠졌다. 이어 金주석은 "구두 전갈을 잘 들었다. 중국의 독립 외교 정책을 이해한다"며 짤막하게 답했다. 내 기억에 金주석이 중국 대표단과 만난 것 중 가장 짧은 것이었으며 회견 후의 관례인 연회도 없었다.

◇비밀 라인 배제=91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장관급 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 체육청소년부 장관이던 박철언(朴哲彦)이 톈진(天津)시 부시장으로 있던 내 동생과 아는 사이임을 내세워 오후 11시쯤 찾아왔다. 나와 내 동생에게 주는 두개의 크고 작은 순금 열쇠를 가져와 한.중 수교의 문을 열자며 그와 나를 중심으로 한 수교 협상 비밀 라인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공식채널이 있으니 비밀 라인은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한.중 수교 배경=85년 4월 덩샤오핑(鄧小平)은 한.중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첫째 장사를 할 수 있어 경제적으로 좋고, 둘째 한국과 대만 관계를 단절시켜 정치적으로도 좋다고 강조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91년 5월 리펑(李鵬)총리가 북한을 방문, 한국이 유엔 가입을 신청하면 중국은 반대하기 어렵다고 통보했다. 이에 6월 金주석은 남북한 가입 문제의 동시 해결을 주장하며 만일 미국이 남북한 가입 신청을 따로 따로 토론하자고 하면 중국이 반대해줄 것, 미국이 북한의 가입 신청을 부결하면 중국은 한국의 가입 신청을 부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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