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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비서

중앙일보

입력

전 북한 노동당비서 황장엽씨가 8일간의 미국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지난 5일 귀국했다. 1997년 2월 망명한 후 6년8개월 만에 성사된 첫 해외 나들이었다. 그는 방미 기간에 백악관.국무부.국방부 당국자들을 비롯해 미 상.하 양원 의원, 학계 및 교민관계자들과 폭넓게 접촉하고 북한 실태와 북핵 현안에 대한 소신과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해 미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이번 학기에 전주대 석좌교수로 임명된 그는 최근 98년부터 몸담아온 통일정책연구소를 사임하고 자신이 세운 인간중심철학연구소 운영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길정우 본사 통일문화연구소장 겸 논설위원이 그를 만나 방미 소감과 최근 북핵 문제에 대한 인식과 북한 개혁 방안 등을 들어봤다.

-미국 방문 중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주변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방법은 비민주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의미죠.

"북한이 핵무기 보유 계획을 포기하면 북한 정권의 안정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은 그 독재체제를 유지시켜 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또 (어떤 국가가 어떤 체제를 세우는 것은) 주권재민의 원칙에 따라야 합니다. 북한에서 민주주의적인 체제를 세우고 안 세우고는 북한 인민의 권리에 속한다는 얘기죠. 이런 의미에서 외부의 큰 나라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비민주적이고 옳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북핵 문제와 관련해 그 같은 논리를 갖고 북한과 협상하려는 6자회담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요.

"한국.미국.일본 등이 6자 회담에서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것을 갖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6자회담은 '원칙적인 측면'이 아니라 '전술적인 흥정'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북한을 대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은 '원칙'과 '전술'을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도 미국 사람들에게 '북한 인권문제를 앞세우고 이에 기초해 핵문제를 논의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선 '미국이 북한을 고사시키려고 하니 북한도 어쩔 수 없이 자위책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몇 나라만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근거가 뭐죠. 어쩌면 작은 나라일수록 더 핵무기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이 작은 나라이기에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아요. 그러나 문제는 인권을 유린하는 범죄집단이 핵으로 무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북한은 인권을 유린하고 남침을 생각하는 범죄집단이기에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제사회가 개입하지 않으면 북한은 핵을 보유할 수도 있을 텐데요.

"설사 북한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북에 있을 때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1994년인가 전병호 군수담당 비서와 핵실험 계획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죠. 그런데 남쪽에 와서 이런 사정을 깔고 얘기해도 마치 내가 '본 것처럼' 보도가 되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비록 적일지라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얼마 살지도 못할 텐데요(웃음)."

-어쨌든 우리는 어떤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까요.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어도 쓰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서 망했나요. 내부를 와해시키면 소련처럼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중국을 북한과의 동맹에서 떼어내면 김정일 정권은 사망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면 총을 쥐어 보고 훈련한 그런 집단들이 일어날 것으로 봅니다."

-최근 자유아시아방송(RAF)과의 회견에서 "북한 군부가 제일 희생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여건이 조성되면 북한 군부가 제일 먼저 반체제 운동에 앞장설 것"이라고 하셨는데,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 하에서 가장 혜택을 보는 것은 군부 아닙니까.

"김정일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군의 지도층입니다. 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죠. 그러나 하층 군인들은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13년 동안이나 김정일을 위해 죽는 연습만 하죠. 그 이후에도 고향이 아닌 탄광 등에 배치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북한 일반 군인은 상당한 불만이 있다는 얘기네요.

"군인들도 근무하는 부대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하지만 군인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층에 있는 군인들은 식량 배급이 제대로 안 되고 있어요. 심지어 배가 고프니까 인민들을 약탈하는 경우도 있죠. 따라서 이들이 조금만 각성하면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나 북한 내부의 혼란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봅니다.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평화유지군'이 들어가면 김정일 독재 체제를 제거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계실 때 주민들의 동요를 감지하신 적이 있나요.

"내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할 때 선생들을 통해 봉기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개죽음이라며 그들을 말렸죠. 때가 되면 총 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고 그때 힘을 합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철저히 통제를 받는데 그들 스스로 각성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독재 체제 아래에서는 쉽지 않죠. 그래서 북한이 일정한 개혁을 하도록 조장시켜 몇십명이라도 주민이 모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서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겁니다."

-북한이 지난해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취한 이후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북한 변화에 대한 논쟁은 쓸데없어요. 일기도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나요. 하지만 소떼를 몰고 가고 금강산 관광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변했다고 보면 안됩니다. 독재 체제의 실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진정한 변화는, 예를 들어 농촌의 협동농장을 일부라도 개인농으로 바꾸는 조치 같은 겁니다. 그러나 아직은 요원해요. 정치적으로는 북한 탈북자 처리 방법이 바뀌거나 정치범 수용소가 폐쇄돼야 진정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시장경제로 너무 변해 중국 사람들도 걱정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히틀러도 시장을 갖고 있었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주의 체제의 골간에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송두율씨가 결국 구속 기소됐는데요….

"(손사래를 치며) 그 얘기는 하지 맙시다. 한국에 온 후 관계당국에서 송두율씨의 혐의를 확인하기에 "사실이다"고 했을 뿐이데, 宋씨가 나를 고소했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음). 북에 있을 때 宋씨의 처지가 어려워 내가 돌려세워 보려고도 했으나 잘못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오신 지 5년여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현실에 실망한 대목도 있을 것으로 아는데, 품으신 뜻을 펴려면 불가피하게 '한국의 현실'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남남 갈등'의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상황이 닥쳐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유민주주의는 승리하고 독재 체제는 붕괴합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만 믿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화돼 가는 조건에서 김정일이 대량살상무기로 남한에 위협을 가하고, 여기에 남한이 무서움을 느끼고 타협해 가면 상황이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의 입장을 지지해 주면 근본적인 위협이 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역량을 집결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미국과의 동맹을 생명선으로 여기면서, 민주적이면서 애국적인 사회단체들의 진정한 통합이 필요합니다. 언론에서도 이 측면을 깊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이렇게 사람들 만나고 집필도 하고 북한에서 고생하는 2천3백만 인민을 구원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겠습니다."

黃씨는 "모 월간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시절 북한과 조총련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증언하셨다"고 묻자 그는 "그 얘기는 하지 말자"면서 손사래를 쳤다.

◇ 황장엽씨 약력 ▶평남(80)▶평양상업학교.모스크바국립대▶김일성종합대 총장▶최고인민회의 의장▶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1997년 망명▶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
정리=정용수 기자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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