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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방청객 전성시대 "우리도 출연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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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뒷모습만 나오거든요. 그러니 그냥 미소만 지어서는 안되고요, 미친 듯이 웃어야 합니다. 그럼 함성 박수 시작!"

지난 14일 MBC 예능 프로그램 타임머신 녹화 스튜디오. 녹화 시간 30분 전부터 방청석에 자리잡은 50여명의 젊은 여성이 안내자의 선창에 맞춰 방청 연습을 시작했다. "자 놀라워라~" "오호-" "점심 안 드셨어요. 그렇게 작은 소리를 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우리가 열심히 소리를 내야 출연진들도 흥이 나 프로그램이 살게 됩니다. 다시 한번 해볼까요."

◇조직화되고 패턴화된 방청=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 혹은 연예인을 위해 무작정 방송국에 찾아간다면 이는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훈련되고 일정하게 패턴화된 방청객들만이 방청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상파 3사 합쳐 이런 방청객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은 무려 80여개. 채널 한개에 20여개의 프로그램이 이들 방청객을 '고용'한 상태다. 오락.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시트콤과 교양, 심지어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방청객들이 동원되는 실정이다. 한 예능국 PD는 "방청객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 싶으면 다시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할 정도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방송가에 자리잡기 시작한 '동원 방청객'들은 이제는 좀더 조직화한 '전문 방청객'들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들은 방송국이 아닌 외부 전문 이벤트 업체를 통해 동원된다. 인터넷 다음 카페 '방청 나라'사이트 회원만도 1만6천명이 넘는다. 방청객 동원 전문 업체인 진진 이벤트사의 우철희 실장은 "특급 연예인이 출연한다는 소식만 들리면 갑자기 신청자가 몇 천명씩 몰려 이를 걸러내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어엿한 출연진의 일부=전문 방청객들은 그저 구경꾼에 머물지 않는다. 단순히 소리를 질러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포맷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 이들의 반응이 적절하게 프로그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이날 타임머신 녹화 현장에서도 방청객들에겐 큐시트를 나누어 주는 등 어떤 내용으로 녹화가 이어질 것인지 사전 교육이 이루어졌다.

"오늘 녹화는 비디오 장면이 다섯개 있고, 그 사이사이에 스튜디오 녹화가 있거든요. 비디오 장면 녹화는 소리를 따는 작업이니 여러분들이 출연진이나 마찬가지예요." 우실장은 "요즘이 방송가에선 이른바 '물갈이' 시기라고 얘기합니다. 수능이 끝나고 방청 경험이 없는 고3생들이 대거 몰려와 요령이 없는 거죠. 베테랑들에 비해 분위기 띄우려면 고생 좀 해야 합니다"라고 귀띔했다.

전문 방청객들의 대부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다. 남성들에 비해 자기 표현도 적극적이고 조그마한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대신 시사 프로그램 등엔 남성들이, 아침 프로그램엔 주부들이 배치되곤 한다.

◇편당 6천원에 1백번 함성=전문 방청객들이 받는 수당은 편당 고작 6천원. 10년 전과 똑같다. 물론 밤시간 때엔 9천원, 오전 1시30분이 넘어 끝나는 시사 프로그램엔 2만~3만원을 주는 경우도 있으나 극히 예외적이다. 5년째 전문 방청객을 하고 있다는 대학생 안혜영씨는 "돈벌이 때문에 두시간가량 이어지는 녹화시간에 1백번이 넘게 소리치는 건 아니죠. 특정 연예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방송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액수가 워낙 적다 보니 몇몇 주부는 한번 여의도에 나설 때 몇 개 프로그램에 연이어 방청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세진기획 박옥자 대표는 "아침 일찍 '아침마당', 오전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보고 오후엔 오락 프로그램을 방청한 뒤 심야엔 토론 프로그램으로 마치는 '프로 방청객'도 간혹 있다"고 전했다.

적극적으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한국민의 정서를 극복하고자 시작된 동원 방청객은 최근엔 지나치게 작위적이란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한 네티즌은 "프로그램 내내 '오호'하는 인디언 소리 때문에 오히려 방송을 보는 것이 짜증스럽기만 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KBS 예능국 박태호 CP는 "억지 웃음보다 최근엔 그저 자연스럽게 방송에 참여해 줄 것을 방청객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 방청객들이 이토록 넘쳐난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조금이라도 인정받아야 신바람이 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최민우 기자<minwoo@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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