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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가사문학의 효시 정극인 불우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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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노래로 태어난 사람이 있었다. 노래로 생겨난 땅이 있었다. 노래로 한 시대를 달래며 어질고 꼿꼿한 마음을 노래의 샘물로 길어 올린 불우헌 정극인. 그가 이 나라 가사문학의 첫 장인 『상춘곡』을 쓴 옛 태인현 고현내(지금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를 찾아간다.
『상춘곡』이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것은 문헌으로 밝혀지고 국문학사의 정설로 되어있는 일이다. 가람 이병기는 나옹의 『서왕가』를 효시로 보기도 하지만 조윤제가 『상춘곡』을 남삼의 작품으로 입을 뗀 이후 많은 학자들이 이를 따르고 있으니 달리 볼 까닭이 없다.
『달하 높이곰 돋으샤 어긔야 멀리곰 비취오시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백제의 여인이 부른 노래 『정읍사』가 일찍이 생겨났던 정읍당. 지금은 정주시가 되었지만 거기 들어앉은 정읍군청에서 동쪽으로 40리쯤 가면 「불우헌 정극인 선생 가사비」가 서있는 원촌(옛 태인현 고현내)이 나온다.
은석산과 월봉산을 등에 지고 동진강을 끼고 앉은 이 마을은 동구밖에 걸린 원촌 마을고적 안내도가 말해주듯 한눈에 들어오는 고적의 전경을 보게된다.
안내도에는 무성서원, 송산사, 시산사, 비양사, 영모재, 한정, 후송정, 탑거리 후원재, 율수재 등 15명소들의 기록까지 적혀 있었는데 영모재만 해도 같은 이름으로 서로 다른 문중에 다섯군데나 있는 것이다.
가위 누대의 역사와 인물과 문화가 맥맥이 살아 숨쉬는 문화유적의 대공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적공원엔 노래비>
바로 이 유적공원의 어귀에 『상춘곡』을 새긴 정극인의 노래비가 서있는데 여기 어디쯤이 정극인이 『상춘곡』 이며 『불우헌곡』을 지은 불우헌의 터일 거라고 믿고 1984년 정읍군수 송하철이 세웠다는 것이다.
정극인은 조선조가 들어서고 멀지 않은 대종1년(1401년) 경기도 광주군 두모포리 (지금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영광 정씨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곤은 창신교위 충무시위사 중령 부사직(창신교위 충무시위사 중령 부사직)의 벼슬을 했고 어머니는 죽산 안씨로 개성부 소윤을 지낸 정의 딸이었으니 날때부터 얻은 바와 배운 바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일곱 형제 중 둘째인 그는 형제들과 더불어 두모포에서 글을 배우며 자랐고 태종17년 17세 되던 해 부모를 따라 영광으로 내려가 살게 된다. 글 재주가 뛰어나 향시에는 강원을 하는 터였지만 과거는 늦어서 29세 되던 세종11년에야 사마시(진사시험)에 합격, 대학관(지금 성균관)의 학생이 된다.
어찌된 셈인지 과거에는 거듭 낙방하여 만년 대학관 학생으로 있었는데 37세 되던 해(세종 19년)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세종은 흥천사(지금 서울 정동)의 사리전을 창건하라는 교서를 내렸는데 흉년이 들어 삼남의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들어 불사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임금의 총애를 받고 세도를 부리는 홍천사 주지 행평의 처형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2천자나 되는 불교를 배척하는 긴 글을 지어 올리는 한편 대학생들과 의기투합해 권당 (권당=동맹휴학)을 주도한다. 세종에게 불려가서도 한사코 불교에 반대하는 논지를 편다.

<가사 『상춘곡』탄생>
세종은 크게 노해 정극인의 참형을 명한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가 나서서 『정극인을 참형하면 뒷날 역사는 어떻게 쓰겠습니까. 불교는 선왕께서 금해온 것인데 척불하자는 신하를 참형한다면 선왕의 뜻을 어기는 염이 됩니다』고 아뢴다. 이에 세종도 마음이 움직여 정극인을 북방으로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짓는다.
정극인은 유배에서 풀려나자 처가가 있는 태인 고현내 (지금 칠보면)로 와 터를 잡는다. 아예 벼슬길에 나갈 것을 포기하고 산과 물과 나무와 풀과 더불어 시 짓고 글읽기로 세월을 보내기로 마음 먹는다. 앞에 흐르는 동진강을 이름하여 「비수」라하고 월봉산에 기대어 초가삼간 지어 불우헌이라 당호를 붙인다.
길게 느리운 푸른 산에
흰 구름 얹혀 있고
불우헌 마루에 앉아
사람의 마음을 밝히거니
시장하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한가로움 속의 멋이여
밝은 달 맑은 바람
더부러 살리라
그는 『불우헌금』에서 이렇게 그의 심사를 읊조린다. 그리고 여기서 마침내 우리네 가사문학을 여는 『상춘곡』을 낳는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애 어떠한가/옛사람 풍류를 미칠가 못 미칠가/천지간 남자 몸이 날만 한이 많건마는/산림에 묻혀 있어 지악을 모를 것가/수간모옥 벽계수 앞에 두고/송죽 울울 속에 풍월 주인되여셔라/엇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도화묘화는 석양 속에 피어있고/녹양방초는 세우중에 푸르도다/칼로 말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이하략).
『아모타 백년행락이 이만한들 어찌하리』로 끝나는 이 시는 정극인의 무한량한 감성의 바닷물이 들고나고 있으며 또한 안빈낙도 속에 개결한 삶을 씨뿌리는 그의 선비정신이 유려하게 번져나고 있다.
그는 시를 쓰는 한편 서민생활과 교육에도 힘썼으니 「태인향약」을 만들어 이웃간 정을 심게하고 「학령」을 정해 교육의 규율을 잡았느니 『그날 배운 글을 못 외면 종아리 6대, 장기나 노름을 하면 70대, 학칙을 어기면 80대, 활쏘기를 좋아하면 90대, 여색에 빠지면 1백대』를 대나무가지로 때린다고 되어있다.
권력과 부귀 따위는 헌짚신처럼 버리고 홍진에 묻혀 살기를 10여년, 어언 그의 나이 51세가 되었는데 뜻밖에도 벼슬길이 열리게 된다. 문종 1년(1451년) 나라에서 시골에서 은둔하고 있는 큰선비들을 등용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정극인이 추천된 것이다.

<서민교육에도 힘써>
친구들의 천거에 못이겨 광흥창 부승이라는 종6품 벼술을 처음으로 얻게 되었고 두해 뒤인 단종1년 (1453년)에는 한성판관 성순조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 정료에 합격해 전주부교수삼진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앉아서도 불우헌이 있는 고현내(원촌)의 생활을 못내 그리워하며 시로 회포를 달래기도 한다.
고현을 생각하며
고요한 글방에 해는 또 긴데
남녘을 꿰뚫어 보노니
마음이 아려 오는 구나
내 만약 땅을 좁힐 수 있다면
저 시산고을을 끌어 오련만
모악산 높고 높은 봉우리가
두 고을을 가로 막고 있구나
시산리는 현재 무성리와 바로 이웃해있는 마을로 당시의 지명이었다. 관직에 있어도 마음은 불우헌에 있던 정극인은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자 홀연히 자리를 박차고 다시 이태인(원촌)으로 돌아온다. 세조가 권좌에 앉은 l5년 그는 시를 읊으며 은둔의 세월을 보낸다.
세조가 가고 예증이 등극한 원년(1469년) 사간원 정언으로 궁중의 부름을 받는다. 그의 나이 69세였다. 늙음을 핑계로 사양하다가 호남에 53군현이 있는데 정언은 한사람밖에 없음과 임금의 뜻을 받드는 마음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예종마저 그해에 승하하고 성종이 대를 잇자 다시 나이를 들어 벼슬을 뿌리치고 이곳에 돌아온다.
성종은 예조판서 이승소를 시켜 서울문밖까지 배웅케 한다. 이승소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극인을 보내며」라는 시는 썼는데 『세상에 나아가고/물려서는 일을/옳다 그르다 따지지 말일/늘그막에 티끌세상맛/배를 불렸어도 봄비에 자란 옛 동산의/고사리만 같지 못한 것을』하고 그의 개결함을 칭송한다. 성종은 그후에도 정극인에 대한 보살핌을 잊지 않았다.

<51세에 벼슬길 올라>
그는 『불우헌곡』을 지어 『즐거웁고나/숨어사는 삶이여/아이종은 노래 짓고/자연을 보며 세상을 잊고 사네』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임금의 은총에 감사하기도 했다.
80세 되던 성종11년(1480년) 임금에 마지막으로 나아가 백성들의 고소법과 사나운 지방관리의 척결 등 사회비리와 제도적 개혁을 진언하고 할일 마친듯 다음해 (1481년) 8월16일 근심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난다. 그가 남긴 노래는 불멸의 가락으로 저 정철·윤선도 등에 뿌리내리고 1786년 『불하헌집』이 주조활자로 간행된다.
이곳 원촌에는 정극인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고 5백m쯤 가면 은석산 기슭에 그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아래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세운 영모재가 옛시인의 바람소리 물소리를 지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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