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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말죽거리 잔혹사' 시인 영화감독 유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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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일기''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시인 유하(40)는 이제 영화감독 명부에도 떳떳하게 이름을 올리게 됐다. 자신의 시집 제목을 딴 데뷔작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2년)의 참혹한 실패로 한때 "영화 찍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던"그는 지난해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러더니 1년 안에 신작 '말죽거리 잔혹사'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내년 초 개봉 예정인 '말죽거리 잔혹사'는 유감독의 자전적 영화로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우울하고 괴로운 학창시절을 그린 것이다. 특히 유감독의 산문집인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95년)에 비친 정서를 영화로 살려낼 것이라고 한다. 에필로그 촬영분만 남겨두고 있다는 유감독과 인터뷰를 했다.

-제목이 특이하다. '여인잔혹사'같은 60년대 한국영화나,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잔혹 이야기'같은 일본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처음 제목은 '절권도의 길'이었다. 이소룡이 썼다는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알다시피 절권도란 이소룡이 창안한 무술이다. 소위 386 세대치고 이소룡의 무협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소룡의 시원시원하고 직설적인 무협은 갑갑한 학교 생활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이소룡 키드'의 이 같은 정서를 영화로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작사에서 제목이 별로 대중적이지 않다고 해서 재미있는 제목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

'군사독재' 70년대 고교 그려

-말죽거리는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지금 서울의 양재 사거리 부근이다. 강남이 한창 개발 열기에 휩싸였을 무렵 나는 말죽거리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가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그때 경험이 영화에 많이 녹아 있다.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이다. 나에게 70년대는 과거가 아니라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현재다. 또 당시 남자 고등학교 풍경이 결국은 군사 독재의 축소판이라는 것도 보여주고 싶다."

-액션 장면이 많겠다.

"한국영화에서 흔히 보는 액션 장면은 피하려고 했다. 얼마나 멋지고 스펙터클하게 보이느냐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적인 톤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많이 다쳤다. 이번 영화에는 연기 경험이 없는, 신인에 가까운 배우들을 많이 썼다. 특히 권상우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다. 이번 영화로 배우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대사 토씨 하나까지 간섭하는 스타일이라 배우가 미리 자기 감정을 설정하고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인들이 편하다. 내 설계도대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 영화를 세 편 만들었는데 시 작업과 비교하면 어떤가.

"당연히 영화가 훨씬 힘들다. 시는 개인 작업인 데다 관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과의 교류에 상대적으로 불친절하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배우라는 유기체를 다룬다는 점도 변수다. 촬영장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데뷔하는 감독처럼 항상 두렵다. 더구나 나는 시인이기 때문에 자기 검열이 있다. 즉 속된 말로 '쌈마이'로 찍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 시는 여백이 많기 때문에 도망갈 구석이 있다. 그러나 영화는 꽉 채워야 되는 장르라 어디 숨을 구석이 없다."

-영화광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영화를 많이 챙겨 보나.

"알려진 것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감독이 되고 나서 영화를 훨씬 덜 보게 된 건 사실이다. 옛날처럼 영화를 편하게 즐기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안목이 깊어진 면은 있다. 대가(大家)의 작품을 보면 이전엔 보이지 않던 면들이 보이면서 '과연 대단하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를 많이 볼수록 영화 찍기에는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류로 흐를 수 있어서다. 그래서 후배들한테는 활자를 많이 접해라, 라디오를 많이 들으라고 권한다."

詩보다 영화가 훨씬 힘들어

-당신은 무협소설.CF.세운상가의 뒷골목 등 주류 문화가 외면하는 것들에 관심을 쏟고 그것을 시나 영화의 소재로 다시 살려내기 때문에 '키치적 상상력'을 가졌다는 평을 받아 왔다. 왜 이런 소재에 매혹되나.

"우리 세대가 보고 자란 풍경이 대중문화다. 그러니 이런 요소를 배제하고 우리 시대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내가 보고 노래한 것을 노래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영화는 그토록 키치에 탐닉했던 시절을 반추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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