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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소스와 소통의 부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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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불현듯 정 시인을 떠올린 것은 계간 '철학과 현실' 겨울 호에 실린 김용석 영산대 교수의 글인 '편재하는 나르키소스'를 읽고 나서다. 김 교수는 나르키소스 신화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소개한다. 하나는 마셜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쓴 '마취된 나르키소스'. 젊은 나르키소스가 물낯(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잘못 알았다는 것이다. 물낯이라는 수단에 의한 자기 자신의 확장이다. 맥루언은 신화를 은유로 사용한다. 맥루언에 의하면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확장이 인간을 마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재치를 빌린 두 번째 해석은 이렇다. 요정들이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호수를 위로하며 묻는다. "그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의 대답은 뜻밖이다.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다. 나는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가 죽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끔찍하다'고 탄식한다. 그는 타자(他者)를 거침없이 이용하고 그 존재마저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지독한 자기애에 전율한다.

김 교수의 글은 한나 아렌트를 특집으로 다룬 다음 장으로 연결된다. 이동수 경희대 교수는 '한나 아렌트와 한국정치'라는 글에서 아렌트를 '소통정치의 중요성을 밝혀낸 대표적인 학자'라고 소개한다. 아렌트는 인간 활동을 노동과 작업, 행위로 나누고 행위만이 정치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엄격한 평등에 기초한 소통적 정치활동으로 보았다. 산파술은 의견의 파괴를 통해 진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 속에서 그 자체의 진실성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1975년 세상을 떠난 아렌트의 담론은 2007년 현재의 한국 사회와 정치 현실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언론이건 야당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는 대통령의 증오에는 끝이 없다. 복직 소송에서 패소한 수학자는 판사를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현대자동차의 노사는 함께 작성한 합의서를 다르게 해석한다. 소통의 부재 또는 왜곡.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의 비극을 지켜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동참하고 있다.

나르키소스의 신화 앞에서 진저리치는 김용석 교수의 '끔찍하다'는 비명에 공감한다. '나'와 '우리'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 지독한 소통 부재의 시대. 나와 우리만의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실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나, 혹은 우리가 아니면 모두가 '남'이고, 대부분이 '적'이다. 소통의 부재 속에 복수의 칼끝이 적의 심장을 노린다. 이 증오의 악순환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정광호 시인이 대학을 졸업한 뒤 쓴 시를 읽어 보지 못했다. 20여 년 전, 한 시화전에서 읽은 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거대한 구두가/나를 짓밟았다/오물을 튀기지 않으려고/내 몸의 구멍이 일제히 닫혔다…." 어쩌면 마지막 작품이었을지도 모를 그의 시구를 되뇌며 생각한다. 이 개결(介潔)한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거울 따위는 보지 않았다. '구멍'은 내면과 세계가 소통하는 창이었을 것이다. 구멍들이 나중에라도 열렸는지 모르겠다.

허진석 신매체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