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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대한 편견 바로 잡을 때"|이형근씨-전 육군참모총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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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요즘 가장 큰 즐거움은 1년에 4∼5차례 최전방을 찾는 일입니다. 전방을 지키는 사병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보면 「군인 정신」이 되살아나면서 온몸에 힘이 솟구치곤 합니다.』
이형근 예비역 대장 (71)은 『젊은 사병의 장작개비 같은 굳센 손을 잡으면 평소의 시국에 대한 걱정까지도 싹 사라진다』고 말한다.
『우리 나라의 최고 애국자는 전방을 지키는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사람들은 부패한 상류층, 특히 타락한 정치인이라고 봅니다.』
46년 건군 작업에 참여, 초대 국방 경비대 사관학교장, 초대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초대 육군교육총감 등을 거치고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장으로 임명돼 육군참모총강, 초대 합동참모회의장을 지낸 국군 군번 1번 이 장군을 사람들은 「국군의 산 증인」이라고 부른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엔 자신이 있습니다. 최근 왼쪽눈에 각막염이 생겨 간단한 수술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양호합니다. 주위에서 고희가 넘은 노인으로 봐주는 사람이 드물더군요. 저 자신도 「늙은이」 소리 듣는 것이 싫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도….
▲하루에 만보 걷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지키는데 정신적인 면도 중요합니다. 58년 예편한 뒤부터 하루 2∼3시간씩 전사 읽기·군가 듣기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데 정신력 강화 방법으론 그만입니다.
-회고록을 준비하고 계시다면서요.
▲5년 전부터 꾸준히 준비해 왔습니다. 해방 이후 주요 역사 현장들을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정확한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져 살아온 과거를 조목조목 기록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정리하기에는 아직 건강하므로 좀더 있다가 끝을 맺고 싶습니다.
-생활 신조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젊은 시절부터 「깨끗하게, 정직하게, 부지런하게」를 생활 신조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세 덕목이 생활 신조가 된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일본 육사 시절 일본인 한 교관이 한국인을 「불결하고 정직하지 못하며 게으른 민족」이라고 평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들의 평이 기억 속에서 내내 잊혀지지 않았고 남의 민족에 우리가 이렇게 수치스럽게 내비쳐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평생 가슴속에 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편 후 여러 공직을 거치셨지요.
▲3, 4공을 거치면서 국방부·국토통일원장관 등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수차례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아 계속 사양했습니다. 다만 60년대 초 주영특명전권대사와 주 필리핀 대사를 한적이 있는데 군대 후배이기도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과 저 자신 외국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수락했지요.
-사회 활동은 어떠하십니까.
▲현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와 한국 자유 총 연맹의 고문직을 맡고 있습니다. 또 육·해·공군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지회의 고문으로 있습니다.
-현 시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국민 정신이 크게 이완돼 있어 큰일입니다. 사회 전반에 황금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있고 세대간·계층간 갈등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의 탈선을 보면 국가의 장래가 어둡게까지 느껴집니다. 지금은 국민 모두가 단결해 국가 역량을 키워 자주 평화 통일에 매진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정치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6공 정권은 국민들의 성원 속에 출범했습니다. 출범 초기에는 여러 일을 의욕적으로 처리하는 것 같더군요.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근 진전되고 있는 남북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한의 유엔 가입 의사 발표는 남북 통일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라 옵니다. 또 남북 단일 축구팀은 정말 보기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평화 통일을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방을 자제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18세 때 일본 육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괴롭히고 짓밟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그들을 꺾는 길은 장교가 돼 나라를 강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의학을 공부하라는 아버님 몰래 도일, 56대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육사에 합격했지요.
-군번 1번을 달게 된 사연은.
▲2차 대전 중 일본군 포병 대위로 중국·베트남 전선에 투입돼 전투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과 함께 귀국, 「일본 군인 생활을 했으니 몸조심하라」는 아버님의 충고로 잠시 대전고에서 훈육 담당 교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중 미 군정청으로부터 건군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46년1월16일 국군의 모체 격인 국방 경비대에 육군 대위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군번을 받아보니 1번이었습니다. 특별히 뛰어나 1번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군인으로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아무래로 6·25기간 중이었습니다. 그 때는 하루하루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한강다리 폭과 때는 정말 생사의 기로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인민군의 저력이 막강함을 눈치채고 조속히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 항전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군 지휘부에 의견이 갈려 우왕좌왕하다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과 일부 군 수뇌부는 급히 남쪽으로 철수한 뒤 우리 부대와 대부분의 시민들이 한강 이북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리를 폭파해 버렸습니다. 부하 사병들과 시민들이 혼란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지휘관의 한사람으로서 자결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6·25당시 한국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유일하게 만난 국군장성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1군단장으로 전선에서 전투 중이던 52년12월3일이었습니다. 아이크 (아이젠하워의 애칭)가 전쟁 상황을 알고 싶다며 국군장성과의 면담을 요청, 미군 측에서 저를 추천한 모양입니다.
아이크는 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전쟁을 빨리, 완벽하게 끝내기 위해 원자탄 사용 가능성을 비치더군요. 그때는 정말 아찔하더군요. 원자탄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동족의 대량 살상을 가져온다」며 적극적으로 사용 불가론을 폈지요.
-합동참모회의 창설의 뒷얘기는 없었습니까.
▲전쟁이 바로 끝난 뒤 제1군단장으로 있을 때인 54년2월 어느날 이 대통령이 갑자기 부르더군요. 이 대통령은 미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고통치권자의 명령이 각 군에 신속히 전달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야 된다고 역설하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창설된 것이 참모회의지요. 합동참모회의를 만든다고 하니 당장 미군 측에서「옥상옥」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반발하더군요. 또 국군장성 중 일부도 미군 측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대통령과 내가 강력히 주장, 관철시켰습니다.
-80년대 이후 일반 국민들의 군에 대한 인상이 많이 흐려진 느낌이 있는데.
▲매우 우려할 만한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군인들이 「무인의 정도」에서 벗어나 명예스럽지 못한 일을 저지른 탓이라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 군인들은 국가의 존립을 위해 묵묵히 맡은바 직분을 다해왔습니다. 몇몇 타락한 군인들 때문에 대다수 「애국 군인」들이 매도당해서는 곤란합니다. 누가 뭐래도 군은 나라의 기둥이며 군인은 국민의 파수꾼입니다.
6·25때 부인을 잃고 모두 6남매를 출가시킨 뒤 혼자 생활하고 있는 이 장군은 『강영훈 전 총리 등 옛날 전우들이 자주 찾아오고 아직 할 일도 많아 한가롭지 않다』고 말한다.
서울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그의 집 거실에는 노장이 걸어온 길을 대변하듯 그가 그동안 받은 각종 훈장 49개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글 이규연 기자 사진 오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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