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유학생(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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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필리핀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웬만한 사람들은 다 영어를 한다. 대학에서도 영어로 강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재도 물론 영어로 되어 있다. 반세기 가까이 미국 식민치하에 있으면서 미국식 영어가 제2국어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필리핀 사람들의 영어발음은 호두알 굴리는 소리같다. 달그락 달그락 한다. 단어만 영어일뿐 발음이나 악센트는 사전을 벗어나 그들의 언어습관에 맞추고 있다. 이런 영어는 필리핀에선 통해도 국제사회에선 영어도,필리핀어도 아닌 낯선 언어일 뿐이다.
그 점에서 인도나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쓰는 영어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영국식 영어를 하기 때문에 발음도 정확하고 윤택하다. 얼른 들으면 굉장히 고급스런 영어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영어 발음이 괜찮기로는 중국사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은 동양언어 가운데 중국어 배우기가 가장 쉽다는 말도 한다. 중국어는 발음이 영어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유학중인 중국학생을 만나면 거의 완벽한 발음을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유학생 비자도 없이 필리핀에 머물며 영어학원에 다니던 한국 학생들이 필리핀 이민당국에 붙잡혀간 일이 있었다. 어이없는 노릇은 불법체류라는 그 사실 보다도 필리핀에서 영어학원을 다닌다는 발상이다.
우리는 그것을 두가지로 해석하고 싶다. 하나는 외국 유학을 갔다는 국내 「과시용 외유」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집 자녀가 설마 그곳에서 영어학원에 다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들의 답답한 심정은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딱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또 하나는 국내에서 재수,삼수를 하다보면 어려운 문제들이 적지 않다.
우선 병역문제만 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에라,모르겠다,차라리 손쉬운 외국여행이나 보내 그곳에서 적당히 눌러 앉게 하자는 「자포자기 반,도피성 반」의 심산으로 하다못해 필리핀에라도 보낸 경우일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낭비냐 하는 것이다.
달러의 낭비,인적 에너지의 낭비,시간의 낭비,국민정서의 낭비. 물론 몰지각한 부모를 탓할 일이지만 교육제도와 정책이 잘못된 책임은 정부쪽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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